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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이 Aug 31. 2022

혁신이 아니라 혁명이라니까요?

<밀크>와 카스트로 거리

나는 과거 4년 간 대기업 S모그룹 재단에서 사회공헌 관련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었다. 몇 년 전 내가 그곳에서 맡았던 업무 중 하나는 대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이를 통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었다. 당시에는 정말 그 일을 잘하고 성과를 만들고 싶어서 굉장히 업무에 몰입해있던 시기기도 했다. 나름 그러한 내 노력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회사에서 운영하는 포상제도에 선발이 되었는데, 포상은 500만원 한도 내에서 업무와 연관된 해외 워크숍, 콘퍼런스, 선진 사례 탐방 등을 자유롭게 기획해 비즈니스 트립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민하다 선택한 목적지는 샌 프란시스코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샌 프란시스코는 스타트업, 소셜벤처 생태계에 있어 가장 혁신적인 시도들이 이뤄지는 상징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출장의 목적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글로벌 대학생들의 소셜벤처 경진대회인 GSVC(global Social Venture Competition) 결승전을 참관하여 그들이 혁신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것. 둘째, 대학 창업과 혁신의 메카인 스탠퍼드 대학과 네트워킹. 셋째, 에어비앤비나 우버 등 당시 혁신적이었던 공유 경제 유니콘 스타트업들의 본사를 방문해 그들의 혁신 문화를 살펴보는 것. 말 그대로 핵심 키워드가 '혁신'인 출장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앞서 말한 출장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계획대로 스탠퍼드 대학에 방문해 GSVC 전체 일정에도 참여를 하고, 여러 스타트업들을 방문해 탐방하는 투어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운 좋게도 스탠퍼드 대학의 소개로 에어비앤비 초기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이제 막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있는 대학생 청년 창업가부터 이미 그 비즈니스 모델을 글로벌한 사이즈로 키워낸 창업가까지 모두 만나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혁신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혁신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혁신 방법으로서 비즈니스 모델보다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용기'와 이런 '도전에 대해 포용적인 생태계와 문화'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이런 사업을 담당하면서도, 대학생들의 문제 인식이나 도전하는 마인드 셋보다 결국 내 성과로 만들 수 있는 팬시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혁신적인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그제야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내 소회를 GSVC 프로그램에서 한 조였던 스탠퍼드 경영대학생이자 학생 창업가인 에이미에게 이야기하였는데, 그때 에이미가 나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조조, 왜 샌 프란시스코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알아요? 이 도시는 '혁신' 정도가 아니라 진짜 '혁명'이 일어나는 도시예요. 혹시 영화 '밀크(2008)'를 보지 않았으면 꼭 한번 봐요. 그러면 이 도시와 문화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


짧은 영어지만 분명히 그렇게 조언해주는 것을 들었고, 그날 일정이 끝나자마자 숙소로 돌아가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밀크'를 보았다. 거장 중에 거장인 거스 반 산트의 작품들을 좋아하면서도 밀크 같은 영화를 선뜻 선택하지 못한 것은 솔직하게 LGBT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나에게 그리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과 지향을 반대하진 않지만 그들의 삶이 내게 공감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내 선입견과 편견의 소산이었고, 이 또한 '밀크'를 보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성소수자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단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도전하는 혁명가로서 하비 밀크의 삶을 집중하려고 한다.


'밀크' 스틸 컷


영화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인 실존 인물 하비 밀크의 전기를 다루고 있다. 하비 밀크는 1977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게이 정치인으로서 샌 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되고, 이후 성 소수자를 위한 권리 조례를 제정하며 성소주자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다 암살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에 거스 반 산트 감독만의 영화적 연출과 각색이 더해져 혁명가로서 하비 밀크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하비 밀크 역의 숀 펜과 악역인 댄 화이트 역의 조시 브롤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1977년의 샌 프란시스코의 인권 운동 현장을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절로 든다.


카스트로 극장(출처: 내 인스타)


그리고 영화의 주된 배경이자 하비가 시의원으로 선발되는 곳이 바로 '카스트로 거리'다. 퀴어 문화의 수도이자 극장 카스트로와 무지개색 횡단보도로 유명한 카스트로 거리에는 '하비 밀크 플라자'가 있어 LGBT 상징인 무지개색 깃발이 항상 펄럭이고 있다. 실제로 하비는 '카스트로 거리의 시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정말 쉽게 성소수자 사람들과 퀴어 문화를 접할 수 있는데, 공간 자체가 지니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더해 마주치는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존중해주는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다. 하비 밀크가 연설을 했던 카스트로 거리의 교차로에 서서 거리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할 도전이 무엇이든 모두에게 포용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과 모두가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줄 것 같은 느낌이 절로 든다. 혁신은 나 한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을 찾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혁명은 사회 전체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거리가 있었기에 하비도 도전하여 결국 '혁명'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맡은 대학생 사업의 프로그램 커리큘럼을 전반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비즈니스 모델 개발의 비중이 훨씬 높았던 커리큘럼을 줄이고, 사회문제에 집중하고 도전하는 서로를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더 많이 구성했다. 그리고 대학생 참가자를 선발할 때도 과거에는 팬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똑똑한 유형의 참가자들을 선발했다면, 이후에는 아직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템이 부족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문제 해결에 도전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참가자들을 더 선발하게 되었다. 이후로 변화된 내 모습을 보고 당시 팀장님이 나에게 "너는 혁신적인 새로운 거 많이 보고 와서, 어떻게 사업 프로그램 돌리는 건 더 올드해지냐"라며 한마디 하셨고, 그때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아 팀장님. 중요한 건 혁신이 아니라 혁명이라니까요."




<'하비 밀크' 추천 포인트>

1) 하비 밀크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하비 밀크의 시간들'이 있다. '밀크'와 비교하며 거스 반 산트 감독의 각색 포인트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훌륭한 영화적 재미가 된다.

2) 두 배우의 연기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숀 펜은 이 작품을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카스트로 거리' 추천 포인트>

1) 보통 샌 프란시스코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장소가 샌 프란시스코 전경을 볼 수 있는 트윈 픽스인데, 트윈 픽스에서 도시 전경을 살펴본 후 걸어서 내려오다 보면 카스트로 거리에 닿을 수 있다. 날씨 좋은 날 산책하면서 도시 거리 곳곳을 경험해보기에 괜찮은 코스다.(시간은 조~금 걸림ㅎㅎ)

2) 카스트로 거리가 퀴어 문화의 상징이라면 비슷하게 히피와 집시 문화의 상징인 하이트-애쉬버리 거리도 추천한다. 이런 다양한 문화들이 꽃을 피울 수 있는 포용성을 가진 것이 샌 프란시스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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