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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패치워크에 한 조각이 되려면

by Lohengrin

나이 60이 되면 그때서야 알고 그때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뭐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다 보니, 아니 살아보니 와닿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의 표현일 것이다. 사실 그것조차 개인적 시각의 일부분일 테지만 그렇더라도 그 사람이 60 평생 경험하여 얻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 60이면 아직 사회에서 물러나기 젊은 나이라고들 항변한다. 예전 같지 않아서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심지어 현대의학의 발달로 인해 10년 전 나이 60과, 20년 전 나이 60의 신체적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현재 나이 60은 시간을 거슬러 가서 예전과 비교해 10년은 더 젊어진 듯하다.


불과 한 세대 전인 30년 전만 해도 부모님 환갑잔치를 하는 풍경을 많이 목격했다. 하지만 지금은 환갑잔치라는 단어 자체가 생경할 정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겉모습만 그렇다. 정신세계도 10년은 젊어졌을까? 반문해 보라. 정신은 별로 젊어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전 세대보다 품격이 사라지고 젊다는 허세만 늘어 있는 듯하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젊다는 것은 뭔가?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에 즉시 반응하며 변화에 잘 대처하고 잘 따라갈 수 있다는 거다. 젊음은 바로 새로움에 대한 욕망을 즉시 실행하는 현장이다. 현장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정보와 마주해야 하고 이를 즉각 처리하고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다. 젊은이에게 그 현장은 항상 새로움의 연속이다. 젊음은 이 현장의 상황과 항상 마주하고 있는 척후병이다.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주변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뛸 수 있다.

그런데 나이 60을 넘으면 새로움이 별로 없는 듯 느껴진다. 무얼 해도 시큰둥하다. 입맛도 없어지고 감각도 둔해진 탓도 있겠지만 무뎌진 칼날은 온전히 본인이 갈지 않았기에 오는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 볼 것 대부분 다 봤고 경험해 볼 것 다 해 본 듯해서 오는 자만심이고 우울증이다. 좋다는 풍경, 멋있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 정도는 이미 다 봤고 그보다 더 멋진 풍광도 봤는데 뭐"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 타 봤어? 그레이트베리어리프에서 스노클링 해 봤어? 그랜드캐년에서 콜로라도 강까지 걸어 내려가 봤어? 장가계의 선경에 들어가 봤어?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마!" 정도로 치부하고 무시해 버린다. 자기가 설정해 놓은 최고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니 그 기준에 못 미칠 것 같은 것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 든 꼰대의 교만과 자만은 디테일을 놓치는 결정적 함정이다. 들여다봐야 한다. 들여다보면 그랜드 캐년의 장엄함도 훌륭하지만 동네 뒷산에 흐르는 시냇물의 가재의 생명과 바위에 붙어 자라는 진초록의 이끼도 경이롭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안 보이고 못 보았을 뿐이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실행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해봐야 내 것이 된다. 남이 하는 걸 백날 옆에서 지켜봐 봐야 내 것이 안된다. 삶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고 수영하는 것과 같다. 내가 타보고 내가 물어 들어가 헤엄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나이 60이 되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아니 안 넘고 그냥저냥 살 수 도 있다. 살아가는데 크게 문제없다. 사는 데는 문제없지만 품질과 품격에는 문제가 있다. 삶이 권태로워지면 안 된다. 항상 새로워야 한다. 새로움에 목말라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중에 가장 큰 욕망이 '새로움에 대한 추구'다. 카사노바는 그 욕망을 반대의 성에서 찾았고 탐험가와 모험가는 오지와 세상의 끝에서 찾았다.


삶이 풍요로워지려면 항상 새로움에 눈떠야 한다. 새로워야 가슴 떨리고 기다려지게 된다. 그것이 인간에게 세팅된 본능이다. 나이 60 넘었다고 움추러들면 어깨 처지고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꼰대로 서서히 변신을 한다. 사회적 퇴물이 되어 가는 것이다. 스스로 그 길로 걸어 들어갈 이유가 있는가? 빨리 함정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신선함이 있는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러려면 움직여라. 날 춥고 돈 없다고 집에만 웅크리고 유튜브나 네플릭스만 쳐다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좀비가 된다.


끊임없이 신독을 해서 시간에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닌 내가 변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을 적응이라고 하고 진화라고 한다. 짧은 인생인데 그래도 뭔가 보람차게 살았다고 자답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자연으로 돌아간 나의 수소, 질소, 산소, 이산화탄소로 분해된 분신들이 다른 쓰임새로 패치워크가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끼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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