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분 좋고 즐거워야 한다

by Lohengrin

'산다'라는 생명 활동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일까? 수많은 철학적 수사를 걷어내고 생물학적 본질을 들여다보면 답은 의외로 명쾌하다. 바로 ‘기분 좋음’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기분 좋음이란 도파민과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적절히 분비되는 상태, 즉 생존에 유리한 환경에 놓여있음을 알리는 뇌의 긍정적 신호다.


이 ‘기분 좋음’은 세상을 살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다. 일을 하든, 놀든, 혹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든 간에 뇌가 ‘쾌(快)’ 상태를 느껴야 우리는 그 행위를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즐거움에는 엄격한 전제 조건이 붙는다. 뇌가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는 신체가 적극적이고 활기차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여유와 물리적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건강’이라는 생물학적 담보가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생존의 기본 욕구가 해결되지 않아 먹고사는 문제에 찌들어 있다면, 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쏟아낼 뿐,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흔히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을 기분 좋은 자기 최면처럼 사용하곤 한다. 물론 열역학 법칙을 거스르는 말이다. 섭취한 에너지보다 소비한 에너지가 적으면 남은 열량은 잉여 에너지가 되어 복부 지방, 즉 ‘똥배’라는 물리적 실체로 축적된다. 하지만 뇌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말도 일리가 있다. 먹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발생하는 스트레스, 그로 인한 코르티솔 분비가 초래하는 신체적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기분 좋게 먹고 그만큼의 대사를 치르는 것이 효율성 면에서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기분 좋음’을 누릴 수 있는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대사 능력이 떨어진 50대 이후나, 혈관 질환이라는 기저 질환을 가진 사람에게 ‘마음껏 먹는 즐거움’은 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소수만이 행복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핵심은 ‘양(Quantity)’이 아니라 ‘균형(Balance)’이다.

생명은 입력(Input)과 출력(Output)의 끊임없는 줄타기다. 폭식이 문제가 되는 건, 입으로 들어온 에너지만큼 몸을 움직여 산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든, 몰입하여 일을 하든, 들어온 만큼 태워버려 에너지의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먹는 즐거움은 죄악이 아니라 축복이 된다.


결국 생명이란 ‘조건’과 ‘균형’이라는 좁은 담벼락 위를 걷는 행위와 같다. 이 담벼락은 교도소의 담장처럼 아슬아슬하다. 균형을 잃고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우리는 ‘질병’이나 ‘고통’이라는 신체의 감옥으로 추락한다.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생명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치열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치열한 생명 활동의 무대는 바로 ‘환경’이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거실의 공기, 손에 잡히는 컵의 감촉,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타인의 체온까지, 내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나의 조건이자 환경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를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이라고 정의했다. 비버가 짓는 댐이 비버 유전자의 확장인 것처럼, 내가 구축한 환경과 내가 선택한 물건들은 내 유전자가 세상에 발현된 또 다른 모습이다. 나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은 다시 나를 규정한다.


이를 뇌과학적 용어로는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유도성)’라 한다. 어포던스는 환경이 생명체에게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성질을 말한다. 우리는 의자를 보면 ‘앉음’을 떠올리고, 문고리를 보면 ‘돌림’을 직관한다. 세상 모든 만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호작용 가능한 어포던스로서 존재한다. 나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유발하지 않는 대상은 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인간은 80억 인구가 각자의 고유한 어포던스로 구축한 80억 개의 서로 다른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고립될 수 있는 개별적 우주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는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접점을 확인한다.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한 협곡도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이미지와 감정이 있을 때 비로소 추억의 장소가 되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도 과거의 시간 속에 함께했던 기억이 있기에 반가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포던스와 기억, 이 두 가지는 경험을 재료 삼아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조건부 함수다.


이 조건들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을 ‘우연’이라 부른다. 우연은 예측할 수 없이 불쑥 다가온다. 하지만 그 예측 불가능한 우연 속에서 마주하는 뜻밖의 행운, 즉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마치 준비된 자에게만 보이는 선물처럼, 이 행운조차 내가 촘촘히 쌓아 올린 조건들과 외부의 우연이 절묘하게 맞닿은 접점에서 피어난다. 예측하지 못했기에 느껴지는 그 간지러운 즐거움이야말로 삶이 주는 묘미다.

생명에는 정해진 목적지도, 절대적인 방향도 없다. 진화론적으로 생명은 그저 조건부 확률에 따라 끊임없이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과정일 뿐이다. 유전과 진화는 어떤 거창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변수에 따라 확률적 분포가 달라지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기적이다. ‘Right time, Right place.’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에 생명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균형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한다. 우주의 먼지가 모여 별이 되고, 그 별의 잔해에서 물질이 생성되어, 수억 년의 진화와 확률 게임을 뚫고 ‘나’라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다.


이토록 희박한 확률을 뚫고 획득한 삶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기적 같은 시간을 기분 좋게 누릴 의무가 있다. 내 몸의 에너지 균형을 맞추고, 나만의 어포던스를 확장하며, 타인과 따뜻한 기억을 나누는 것. 그것이 확률적 우연으로 던져진 이 생명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외이자 찬사일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역지사지와 경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