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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5. 2024

제망우가(祭亡友歌)

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12

생무백년사천추(生無百年死千秋) 살아서는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년을 살리라

안면귀객청산유(顔面歸客靑山有) 아는 사람 모두 돌아가 청산에 있으니

만금유전공수거(萬金有錢空手去) 만금의 돈 있으나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아신하처청산향(我身何處靑山向) 이 몸 쉴 곳 찾아 청산으로 향하네


서울 시내에서 자하문터널을 지나 세검정 삼거리 왼쪽 홍지문 쪽으로 가다 보면 맞은편에 '쉼 박물관'이라는 독특한 곳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운구할 때 사용하는 '상여'와 관련된 민예품을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죽음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오고, 죽음을 '쉼'이라는 단어로 매듭지으면서 삶과 죽음을 동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이름만 보고, 멋 모르고 편히 쉬러 찾아갔다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철퇴를 맞는 오묘한 분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위의 칠언절구도 쉼 박물관 상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어제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상여 태워 청산으로 보냈습니다.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힘든 육신을 두고 훨훨 청산으로 떠났습니다. 떠날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만 막상 부고를 받아 든 손이 떨렸습니다.

지금 내 나이 60, 환갑입니다. 올해는 직장을 다니던 친구들이 모두 정년퇴직을 합니다. 저 역시 이번달이 정년달입니다. 이런 상황에, 친구의 부고 소식은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을 만들어냅니다.


누구에게는 새로운 출발이고 누구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시간으로 규정하더라도 너무도 극명한 '상변이(相 變異 ; Phase Transition)'의 현장에 발가벗고 서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세수를 해야 하고 침구를 정리해야 하고 랩탑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있습니다. 두유 한 잔에 빵 한 조각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은 남겨진 자의 현실이 되고 살아내야 하는 현재의 순간이 됩니다.


친구의 부고를 받고 찾아간 빈소에는 많은 동창친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들 그렇지만 평상시에는 자주 보지 못합니다. 사는 게 뭔지, 그저 어쩌다 다른 친구들을 통해 "그 친구 잘 살고 있다니?" 정도의 안부를 물어볼 뿐입니다. 청산으로 먼저 떠난 친구로 인하여 이렇게 소원했던 친구들도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다들 침울한 얼굴 표정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미 예견된 사건이라 슬픔의 면역을 겪어서 그런 듯합니다. 영정 속 친구도 잔잔한 미소로 동창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호스피스병동에 있을 때 여러 친구들이 찾아가 위로하고 위안을 주었던 기억들이 슬픔을 덮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삶을 시간적으로 보면 관성적으로 살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화양연화에서 노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삶을 방향적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공간에서 방향이 바뀌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눈치챈다는 것은 삶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생명이 특별하다는 것은 단지 이 우주에서 지구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본질은,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입니다. 죽음은 상(相)이 변한 상태일 뿐입니다. 삶과 죽음에 경중이 없고 같다는 것입니다.


원래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본질이고,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상이자 착각일 뿐입니다. 닥쳐봐야 알고 지켜봐야 할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닥칠 일입니다. 그 다가올 시간이 언제인지 시점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돌아서면 당장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달랑거리는 지갑을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자동차 점검하라고 깜박이는 경고등이 눈에 보이고 아파트 가스계량기 점검 온다는데 시계를 쳐다보게 됩니다. 배우자 생일이 다가오는데 선물은 뭘 사야 하나 고민이 쌓이고 윗집 쿵쾅거리는 발걸음이 귀에 거슬립니다. 그렇게 다시 시간에 매몰되어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현실 속의 모습에 침잠하게 됩니다.


청산으로 떠난 친구가 남겨준 교훈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까먹고 맙니다. 건강을 위해 피트니스센터를 가기보다 술 마실 데가 없나 휴대폰 속 전화번호를 뒤적입니다. 현실의 유혹은 평생 걸어왔던 습관의 표현형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보고 싶더라도 최대한 늦게 오는 게 좋을 거다"라고 하며 청산으로 먼저 떠난 친구는, 행적만 청산에 입적하고 존재는 현재의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에 행복한 편린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대인호변(大人虎變 ; 호랑이가 털을 갈고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처럼 대인은 천하를 혁신해 새롭게 바꾼다)으로 상(相)을 바꿔 경고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세를 남기도 떠난 친구의 영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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