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Oct 31. 2024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16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안 오기를 그렇게 바랬지만 기필코 오고야 만 숙명 같은 그날이 말이다. 현 직장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이미 지난주 23일에 회사공식 홈페이지에 '10월 정년사직' 인사발령이 떴다. 인사발령지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모두 24명이나 됐다. 매월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이름을 올린다. 참 좋은 회사를 다녔다는 증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년까지 회사를 다녔다는 것이 말이다.


정년퇴직자가 매월 이렇게 많다 보니 회사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소속부서에서 후배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송별회를 치르는 것으로 정년근무를 축하받는다.


나는 이미 지난 9월 말에 부서 직원들과 송별식을 치렀다. 10월 한 달을, 남은 연차휴가를 내고 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분에 넘치는 선물과 꽃다발도 받았다. 후배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송별사를 하는데 그때까지는 담담했었다. 송별식 하던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마지막 근무일인 9월 30일이 월요일이었기에 하루가 더 남아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인간의 나약함은 아무리 가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의지하는 힘으로 작동되는 모양이다. "나에게 아직 하루가 더 남았다"는 위안이 눈물을 넘어서 있었다. 정년퇴직이라고 크게 즐겁거나 자랑스럽거나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하지 않은 복잡 미묘한 감정이 혼합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뿌듯함이 선점하고 있어서일 게다.


입사이래 홍보실에서만 35년을 근무를 했다. 정확히는 34년 3개월 하고도 16일을 있었다. 한 부서에서 이 정도 시간을 근무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물론 전문 엔지니어들이야 붙박이처럼 한 부서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화이트칼라 직장인치고 한 부서에 그렇게 오래 눌러앉아있을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참 좋은 회사를 다녔고 좋은 후배들과의 인연이 있었기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한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난달 말일이었던 9월 30일. 10월 한 달을 연차휴가를 냈으니 그날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은 이미 모든 업무와 책상정리를 마친 상태라 하루종일 컴퓨터 화면에 펼쳐지는 인터넷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온갖 상념과 회한들이 겹쳐져 몸은 가만히 있는데 생각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뒤죽박죽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4시 반 퇴근시간이 되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전원 끄기에 가는 손길이 망설여졌다. 10여분이 더 흘렀다. 그러고 보니 후배 직원들도 하나같이 자리에 앉아있다. 4시 반 땡 되면 후다닥 일어나던 후배들이었는데---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후배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를 쳤다. 정년퇴직하고 사무실을 나서는 선배에 대한 마지막 환송이었다. 그전까지는 멀쩡했는데 박수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 눈물은 뭐였을까?


어머니의 태 속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올 때의 그 불안으로 우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경이었을까? 회사라는 보호막을 벗어나 혈혈단신으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현관까지 따라 나오는 후배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그냥 한 번씩 악수하고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오늘을 맞았다.


내일부터는 회사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회로가 차단될 것이다. 이메일 계정도 막히고 목에 걸고 다니던 사원증도 더 이상 기능을 못할 것이다. 어쩌다 시내 나오면, 목에 사원증을 걸고 다니는 청춘들이 부러워질게 분명하다.


그렇게 홀로서기에 나섰다. 폭풍한설 몰아치는 현장이 있음을 안다.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잘 넘겼으니 이제 새롭게 쓰는 페이지를 다시 잘 쓰면 된다. 노트의 크기를 줄이면 된다.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마주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놀 수 있는 여유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과 이를 이루기 위한 약간의 돈이 있으니 세상의 화양연화가 모두 내 품 안에 있다.


환희로 오늘을 맞고 내일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오늘 같은 정년의 날을 지켜준 회사와 후배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한다.


오라! 백수의 시간이여!!! 기꺼이 마주하고 기꺼이 응대해 주리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