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이 사는 세상
소위 '선진국'인 스위스에선 인종차별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굳게 믿는 한국 친구들을 많이 봤다. 과연 그럴까?
위 그림은 독일 원산이지만 스위스에서도 널리 사랑 받는 초콜렛 디저트인 '쇼코쿠스(Schokokuss)'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 마쉬멜로 크림을 아주 얇은 초콜렛 코팅으로 감싼 달콤한 음식이다. 한 입 베어물면 겉의 바삭한 초콜렛이 깨지면서 안의 크림이 퍼져 나오는 식감이 환상적이다. 차게 먹으면 그 바삭함이 배가된다.
다양한 맛의 크림을 채워 넣은 쇼코쿠스는 크리스마스 마켓에도 해마다 등장하는 인기 아이템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가 문제냐고?
지금은 '쇼코쿠스'또는, '샤움쿠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원래 이 디저트의 이름은 '모렌콥프(Mohrenkopf)'였다. '모렌(Mohren)'은 '무어인(Moors)'을 뜻하는 독일어인데, 이 경우 그 민족학적 정의와는 상관 없이 흑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콥프(Kopf)'는 독일어로 '머리'를 의미하니, 이 깜찍한 디저트는 놀랍게도 '흑인의 머리'를 빗댄 음식이었다는 말이다.
그 인종차별적 의미 때문에 스위스 내에서도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지금의 '쇼코쿠스'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모렌콥프'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게 왜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모렌콥프'라는 명칭은 지켜내야 할 스위스의 전통"이라 주장하며 길에서 '모렌콥프 나눠주기'를 시전한 우파정당도 있었다.
스위스는 인구의 25%가 외국인이다. 우리나라의 3%에 비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출신국으로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가장 흔하며,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인이 80%를 차지한다. 나 같은 아시아 사람은 오세아니아 국가 출신 인구와 합쳐 8%정도다(2018년 스위스 정부 자료에서 발췌).
이렇듯 외국인과 어울려 사는 게 일상이다보니, 스위스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꽤나 열려 있(다고 스스로 믿)는 편이다. 다만, 아시아와 아시아인을 향한 스위스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유럽보다 4배 넓은 대륙, 저마다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총 48개 나라에서 전 세계 인구의 반이 살아가는 땅덩어리임에도 아시아를 '저기 어딘가 붙어있는 한 국가'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짙다.
이러한 이들의 무지는 스위스에서 판매되는 제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스위스의 국민 수퍼마켓, Migros에서 판매되는 냉동야채에는 위와 같이 'Asia Mix'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동북아시아 사람인 나는 그저 의아한 작명이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껍질콩과 죽순을 일상적으로 먹었는가?
스위스의 또다른 국민 수퍼마켓, Coop에서 판매되는 또다른 제품을 보자.
Coop이라고 나을 바 없다. 이곳 제품에서도 스위스 사람들의 아주 제한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같은 아시아라도 춘권과 딤섬은 한국 사람에게도 엄연히 '외국의 음식'이건만, 자기들 멋대로 '아시아 믹스'로 묶어 판다.
여기서 8년을 산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스위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시아란 태국과 중국(또는 일본)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빈곤하다보니 나만 보면 불교국가 식으로 합장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중국 사람들을 비하하는 대표적 인종차별 언어인 '칭챙총'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외모만 보고 중국인, 또는 일본인으로 판단하고 '니하오', '곤니찌와'로 인사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에서는 '니하오'라는 인사를 던지며 호객행위를 하는 일이 흔하다. 어느날은 치즈를 사러 갔더니 주인이 '니하오'라 인사하길래 아시아 사람 보면 무조건 니하오라고 인사하지 말라고, 그거 굉장히 기분 나쁜 인종차별 언사라고 조용히 지적했더니 "아니, 내 딴에는 잘 해보려고 한거야."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이런 게 인종차별인줄 인식 못한다는 방증이다.
독일어 학교 선생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무조건 중국에 대해서만 물어봤었다(어쩌라고?).이곳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자기가 아는 유일한 동북아시아 국가인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을 평가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유럽 백인 특유의 우월함이 몸에 배어, 아시아라면 무조건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줄 아는 사람도 엄청 많다.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 내게 취리히를 구경시켜주던 스위스인 동서가 자랑스럽게 취리히 도심을 둘러보며 내게 조심스레 묻던 말과 표정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도시에 트램이 다녀서 참 편리해. 그런데 혹시...서울에도 트램 있어?('아시아는 못사니까 분명 이런 신문명 없을텐데 물어봐서 미안해'라는 뉘앙스)"
(참고로 이분은 2017년 서울에 직접 와서, 쾌적하고 넓고 신속한데다 와이파이마저 빵빵 터지는 지하철과 세련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젊고 예쁜 태국 여성들을 첩이나 애인으로 둔 부자 할배들이 많은 나라다보니, 나 같은 아시아 여자를 보면 다 '팔자 고치러 스위스 남자랑 결혼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태국 여자들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생각하는 '태국 여자'가 어떤 이미지인지 알기 때문에 태국 여자로 보이는 게 싫은 것이다).
한 번은 이탈리아인 친구랑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갔는데, 내가 주문할 땐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사무적으로만 대하던 웨이터가 이탈리아인 친구가 주문하니 태도가 확 공손해지는 거다. 내가 예민한 건가 싶었으나, 심지어 나와 친구가 동시에 식사를 마친 후에도 노골적으로 그 친구와만 눈을 마주치며 '식사는 괜찮으셨습니까?'라고 묻는 걸 보며 내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외국인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위협한다 여겨 혐오감을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아는 한국인 지인은 이곳에서 아이와 함께 외출했다가 '너네 나라로 가버려!'소리와 함께 한 스위스 여성에게 지팡이 테러를 당했고, 난 친구를 만나러 가던 버스 안에서 '망할 외국인들! 너네 나라로 꺼져버려(Fxxxing foreigners, go back to your country)'라는 문구를 마주치기도 했다.
독일 가까이 붙은데다, 세계대전의 영향 아래 있었고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스위스의 특성 상 이곳 사람들도 히틀러의 인종차별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인종차별주의자 라는 말을 듣는 걸 매우 두려워하지만, 자신들이 사실 일상에서 은근히 차별을 실천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니하오' 인사를 받아도, 웨이터의 외면을 받아도, 생판 모르는 남에게 지팡이로 맞아도, 휘파람 소리와 함께 캣콜링을 당해도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일을 나만 겪었겠는가. 피부색 때문에 차별 당했다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앞서 언급한 쇼코쿠스 이야기처럼, 스위스의 인종차별은 공기 중에 퍼져 있다.
스위스는 외국인들 없인 경제 지탱이 안되는 나라다. 이미 고도로 발달한데다 노령화가 심각한 사회라서, 젊은 이민자들이 없으면 정체될 늙은 국가다. 이곳 사람들이 진정한 '선진국'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스위스의 미래를 만들어갈 외국인들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