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아직인가
주말에 순천의 송광사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추석 연휴니까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기는 무슨,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였다. 햇빛은 강렬했고 습도는 높아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루룩 흘렀다. 폭염 경보가 여러 번 울렸고, 한낮의 매미는 우렁차게 들렸다. 아직 여름이었다.
딱히 템플스테이를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애인이 내게 "지인이 송광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는데 엄청 괜찮았대, 갈래?"라고 물어보길래 나는 "그래, 그럼. 가자."하고 결정되어 추석 연휴 주말에 송광사에 가게 된 것이다.
간단하게 템플스테이 일정을 순서대로 적어 보겠다. 처음은 간단하게 오리엔테이션 느낌으로 템플스테이 운영하는 분들이 나와서 소개했다(버스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는 이 부분은 건너뛰었다). 그다음에는 안내자 역할을 맡으신 스님께서 참여자들을 데리고 송광사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스님은 2시간 넘게 쉬지 않고 설명했는데,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달변가였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예불 시간을 가졌다. 어릴 때 다녔던 교회의 예배와 비슷하면서도 뭔가가 달라서 흥미로웠다. 저녁에는 차를 마시며, 템플스테이 참가자들과 스님이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차담 시간이 있었다. 말이 차담이지, 사실은 고민 상담을 스님이 들어주고 해결책을 주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이는 굉장히 심각한 고민이 있었고, 또 다른 이는 되게 사소한 고민을 말했다. 스님은 빙 둘러 이야기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라서, 옆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차담이라길래 그냥 차만 마시고 대충 이야기하다가 말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스님의 대답을 통해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내 고민은 별것도 아니어서 대충 넘어갔다. 아주 천만다행이었다).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내 경험과 겹쳐서 보고, 고민하고 방법을 강구하다 보면 자신만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유익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송광사 주변을 도는 산책 시간이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산길로 오르락 내리락 다녔다.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다리가 조금 아팠다. 스님은 익숙한 길인지 굉장히 사뿐사뿐 다니면서 우리를 인도했다. 그러면서 말씀은 어찌나 유창한지. 스님은 괜히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중간중간에 송광사가 배출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말씀을 듣기도 하고,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썼다는 암자도 둘러보았다. 다시 송광사로 돌아와서 점심까지 먹고(식사는 총 3끼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은 종료되었다.
이번이 두 번째 템플스테이인데 경험과 체험적인 측면에서 그때보다 더 좋았다. 또한, 불교에 대한 강요가 없고, 참가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프로그램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갑자기 현장에서 아프거나, 기분이 안 내켜서 참가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나저나 템플스테이를 학교 다닐 때 경험했으면 국사 시간에 점수를 잘 받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송광사 템플스테이를 마친 뒤, 시간이 남아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까지 돌아다녔다. 두 곳에서도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순천에서 돌아와 한밤중에 서울 용산 땅을 밟았다. 커다란 빌딩과 네온사인, 자동차 무리들과 환한 가로등 불빛이 그야말로 현란했다. 몇 시간 전까지 순천에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KTX를 탔는데 마치 몇십 년을 점프한 기분이랄까. 서울과 순천은 공기의 질감과 냄새가 달랐다. 그리고 바람도. 시원했다. 아직 멀었지만 이건 분명, 가을바람이었다. 올해는 느지막이 가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