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인생은 모르겠고, 오늘만 알면 되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나는 '수학을 포기한 자'였다. 더 정확히는 수학이나 물리 과목에서 계산 문제가 나올 때면 치열하게 문제를 풀었던 기억보다 나의 운이 5지선다 중 하나에 부합하기를 기원했던 그런 학생이었다. 이러한 '수포자'였음에도 타고난 운빨 덕분인지 '자기 추천 전형'으로 불리던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다. 전공도 수학과 거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법학'이었다.
고등학교 문과시절, 이과 친구에게 "근의 공식으로 밥 해 먹을 일 없다."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다행히도 서른 넘게도 그 말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인생에서 수학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아니었다. 사법시험 문제 중에 상속 유류분을 계산하는 문제를 당면했을 때나 공공기관 입사시험인 NCS의 수리영역을 마주했을 때 발목을 잡히긴 했다(그래도 결국엔 공공기관에서 월급을 받아먹으며 살고 있으니 발가락 정도 잡혔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긴 하다.).
풀라던 확률문제는 풀지 않고 나의 운을 확률에 맡기던 그날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어쩌다 보니 과학기술진흥유공자로 선정되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을 받게 되었다. '수포자'가 과학기술을 진흥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이상한 일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역시도 나의 고등학교 생활과 연관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저작권법」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와 연관된 활동들을 했었고, 이 결과들로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사법고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쯤 나는 「저작권법」의 좀 더 상위 개념이자 사법고시의 선택과목이었던 「지식재산권(법)」에 흥미를 느껴 진로의 방향을 확고히 정했었다('지식재산권'이라는 용어가 생소한 사람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특허·상표·디자인·저작권 등'을 통칭하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특허'와 관련된 공부를 하다 보니 과학기술과 수학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어 제법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법리들을 학습하다 보니 '진짜'과학자들이 다루는 과학기술 이론보다는 그 성과를 활용하기 위한 제도와 기술가치평가 방법 같은 것들을 주로 습득하게 되었다. 과학기술과 한집에서 같이 살만큼은 아니지만,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친밀감 있는 이웃사촌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친밀감으로 강물 흐르듯 과학기술을 다루는 공공기관에 연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고, 벌써 연차로는 7년, 만으로도 6년이 다되어 간다.
수학 싫어서 법대 갔던 사람이 연구원이 될 줄이야. 정말 사람 인생은 모른다. 오늘에서야 생각해 보니 먼 인생은 몰라도 하루하루는 알차게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식재산권을 공부할 때엔 최연소로 지식재산 교수요원 인증을 받는다거나 늦은 나이에 병사로 입대했을 때도 KCI 등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는 자기만족 차원에서 사비로 업무에 필요한 교육을 듣기도 하는 등 뾰족함 없이? 회사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물론, 직장인들의 디폴트값인 '빡침'은 제외하고...).
아무래도 표창을 받은 이유도 크게 모난 부분이 없어서 인 것 같다(물론, 이런 나를 시기질투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지도 모른다). 동료들과 선배 연구원 분들은 큰 사고 치지만 않으면 재직 중에 한두 번은 받을 수 있는 그런 표창이라고들 하지만 '수포자'였던 나에게 이 표창이 주는 의미와 물음표는 확실하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이런 날들이 모이면 긴 인생도 좋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