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까워질 때 벌어지는 일들
내가 산 미켈 인 보스코라는 작은 도시에 온 건 단지 실수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지도를 들여다보았다면 이 작은 마을에 올 일을 없었을 거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만토바에 있어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토바에 온 것은 맞다.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가고자 한 곳은 만토바현의 현도 만토바였고, 도착한 곳은 만토바현의 산 미켈 인 보스코라는 작은 마을이다.
카우치서핑 어플에서 만토바라는 지역 이름만 보고 한 친구에게 하룻밤 재워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이 일의 출발이었다. 답신에서 재워주는 거야 문제없지만 정말로 이 마을로 오는 게 맞느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의구심 넘치는 눈빛을 볼 수 없다는 건 문자로만 주고받는 대화의 한계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거기로 가는 게 맞다 대답했다. 이윽고 집주소가 적힌 메시지가 도착했다.
구글 지도에 주소를 적어 넣고 나서 산 미켈 인 보스코가 만토바와는 삼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몇 마디 말로 실수를 되돌릴 수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저곳 혼자 떠돌다 보면 새로운 장소가 주는 뜨거운 희열보다 사람과 만나 느긋하게 떠드는 시간의 따스함에 이끌린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 집 한쪽을 기꺼이 내어줄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다. 마을 입구 작은 식당에서 알레시아를 만나기로 했다.
헝클어졌다고 하기에는 정돈된, 정갈하다고 하기에는 군데군데 삐져나온 머리카락들. 친절하다 하기에는 표정이 무척 단단하고, 야박하다 하기에는 말투가 부드러운 편이다.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주인은 나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오묘한 시선을 구별하는 감각기관들이 털을 곤두세운다. 눈빛만으로도 두려움이 호기심보다 세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간 쌓은 경험에 비추어보아 이럴 때는 딱히 뭘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처음 보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나저나 종일 고기가 먹고 싶었다. 메뉴판에서 익숙한 건 까르보나라뿐이다. 지금 먹고 싶은 건 잘게 부순 관찰레(돼지 머리 고기로 만든 이탈리아식 가공육)가 아니라 입 안에 가득 넣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덩어리 고기다.
아라비아따 메뉴 사진에서 미트볼처럼 생긴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보았다. 분명히 보았다(지금이야 아라비아따 파스타를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만,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2012년에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정도 알고 있으면 신세대라 말할 수 있었다). 열망이 지나치면 세상을 바라는 대로 보고는 한다. 아라비아따 파스타가 식탁에 놓이자마자, 메뉴판 사진에 나온 고깃덩이가 뭉쳐있는 붉은 소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 하루다.
포크로 파스타를 집어 한입 베어 물자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기대한 건 부드럽고 새콤한 토마토소스의 풍미다. 애초에 매운 음식이라는 걸 알고 먹었더라면 이처럼 부끄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에취! 입안에 머금었던 파스타는 식당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식탁 밑으로 머리를 쑤셔 넣고 연신 재채기했다. 놀란 주인이 휴지와 오렌지 주스 한 컵을 들고 다가왔다.
식탁 아래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인은 고개를 젖히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줄줄 흘러내린 눈물 콧물 덕분에 내 얼굴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쯤 맺힌 눈물 덕분에 내가 보는 세상에도 반짝이는 별이 떴다. 웃고 있는 주인의 얼굴과 식당 곳곳에 별이 빛났다.
웃음은 다른 웃음을 빚는다. 주인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빛이 났다. 다시 식탁 밑으로 고개를 쳐 박고는 등짝을 들썩 거렸다. 내가 웃으면 그가 진정했고 내가 진정하면 그가 웃었다. 건네받은 휴지 반을 갈라 다시 주인에게 주었다. 그는 휴지 반장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주인의 울대가 사정없이 떨렸다. 젠장 웃어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복통이 느껴졌다. 한국말로 제발 그만 웃어요! 하고 읍소했다. 눈물이 났는데 반은 웃음이었고, 반은 웃음을 멈추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그사이 그는 내 어깨를 몇 번이나 찰싹 때렸다.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 오렌지 주스를 건네받았다. 그 순간 입안에 남아 있던 매운 고추가 목을 간지럽혔다. 에취, 쨍그랑! 바닥은 이내 오렌지 주스 범벅이 되었고 깨진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오케이? 그의 표정을 보고 ‘괜찮아?’라고 묻고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오케이! 오케이? 하고 말했다. 첫 번째 오케이는 ‘괜찮아!’ 두 번째 오케이는 ‘깨진 컵은 어쩌지?’였다. 그러자 유리 조각을 치우던 그가 오케이!라고 했다. 그 후로 내가 파스타를 먹을 때마다 주인이 물었다. 오케이?
얼마 뒤 알레시아가 도착했다. 주인과는 아는 사이 같았다. 알레시아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컵을 깨뜨린 건 어떻게 계산해? 주인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이방인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며 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고. 도리어 한국인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라며 특별한 날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미안함과 민망함을 덜어내려는 요량으로 그의 말에 농담을 얹었다.
“특별한 날이 몇 번 더 있으면 이 가게 컵이 다 깨져 없어지겠어.”
그는 웃으며 되받아쳤다.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연락해. 컵을 모조리 플라스틱으로 바꾸게.”
그런 순간이 있다. 우연한 일이 조각조각 벌어지다 어느 순간 얼개 이루며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주인과 나는 서로를 알지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지만 분명 이전보다 가까워졌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다. 재채기했을 때? 아니면 내 어깨를 주인이 탁탁 때렸을 때? 그것도 아니면 그의 떨리는 울대를 보고 다시 식탁 밑으로 고개를 쳐 박고 등을 들썩거렸을 때?
이유나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이제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 정도면 지나가는 식당 손님 치고는 꽤 오래 기억에 남지 않겠나. 살면서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인연이 있어 나쁠 건 없지 않겠나. 그러고 보면 사람과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가까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