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는 발걸음에 경쾌함이 가득했다. 통통 도도독 거리며 리듬감 있게 걷는 여성이 지나가자, 사람들도 그 활기에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는 그녀의 기분에 공감하여 슬며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제 갈 길을 가고 있었고, 여름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한 꽃들은 쓸모를 다한 꽃잎들을 날리느라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봄의 끝자락이었다.
손에 쥔 구름 라테도 시미나의 기분처럼 몽실거렸으며, 햇빛 향이 가득한 얼굴은 누가 봐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거리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가로수 사이로 비치는 햇빛 때문인지 시미나가 반짝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고 인사를 건넸다.
“ 시미나씨, 오늘 좋은 일 있나 봐요? 얼굴 엄청 좋아 보이네요. ” 라든가
“ 오늘 뭐야? 데이트? ” 라든가,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모두 시미나가 평소와는 다른 긍정적인 기운에 쌓여 있다는 언급이었다.
사람들의 호들갑과는 다르게 시미나에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휴일을 보낸 뒤 일찍 일어나 햇빛 샤워를 하고 맛있는 점심을 챙겨 먹었으며, 오랜만에 예쁜 옷을 꺼내 입고 자신을 치장한 다음, 여유로운 상태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사 들고 산책을 즐기며 출근한 것뿐이었다.
그래, 그저 그것뿐이었다.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바뀐 것이 없었고 단지 시미나의 일과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발걸음은 다른 날과는 매우 달랐다. 시미나도 모르는 그녀의 기분은 발끝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 데이트는 무슨 요, 그냥 낮에 일이 좀 있어서….”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분 좋은 마음에 한 번 꾸며 봤는데 괜찮아요?'라며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시미나는 출근 전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멀쩡하게 입었다는 듯이 말끝을 얼버무리며 민망한 듯이 웃었다. 못 알아볼 뻔했다는 둥, 이렇게 예쁜데 평상시에 좀 꾸미고 다녀 라는 등의 덕담인 듯 타박인 듯한 사람들의 관심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오랜만에 자신감이 넘치던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의 작은 마음의 소리를 들어준 것뿐이었다. 입가를 간질이는 커피의 구름 거품이 진짜 구름처럼 포근거렸다.
시미나의 기분과는 다르게, 주말이라 상담소는 혼돈 그 자체였다. 주말 근무자들의 교체시간은 낮 근무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중구난방이라, 자리가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야간 근무자들, 퇴근하는 주말 근무자들, 관리자들을 소리 높여 부르는 직원들, 자리를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퇴근할 근무자들을 재촉하는 막내 관리자들까지 출퇴근 시간 수십 개의 워프 포탈 환승 게이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시미나의 기분을 망치지는 못했다.
“ 관리자들의 빨리빨리, 지금 우리 대기인원 부족 해요. ” 라며 재촉하는 소리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 소리처럼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즐거운 하루의 시작에 알맞은 흘려 듣기였다.
“ 고객님, 지금 우주 상담소에서 우편물을 받았다는 말인가요? ”
“ 상담소인지는 모르겠다니까요. 아버지가 우편물 수령 했다고 연락이 왔다고 했잖아요! ”
“ 그러면 왜 우주 상담소에 연락을 주셨을까요? 보낸 기관은 어디인지 확인은 해 보셨나요? ”
“ 모르겠다고 몇 번을 말해요! ‘이민자용 증명서 미접수’라고 쓰여 있다는데 우주 상담소 말고는 다른 확인 방법은 없잖아요. 빨리 확인해 줘요! 아니 도대체 똑같은 말을 몇 번을 물어봐! ”
“ 고객님, 안드로메다 이민국접수 서류라면 이미 처리 완료라고 확인되고, 말씀하신 이민자 관련 다른 내용은 조회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시간에는 안드로메다 이민국에 직접 확인해 보시거나, 내일 지구 이민국에 확인해 보거나 더 좋은 방법은 서류 발송기관을 확인해 보고 해당 기관으로 연락하시는….”
“ 그럼 어떻게 하냐고, 다른 확인 방법이 없는데! 지구 이민국은 지금 연락 안 받잖아요! 서류 확인해 달라는 말을 몇 번을 해요! ” 시미나가 다른 방법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지만 전혀 듣지 않고 있던 고객은 결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안드로메다 이민국 서류라더니 정말이지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간 것이 분명했다. 여러 차례의 실랑이 끝에 안드로메다 이민국은 시차 상 지금 연락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쪽 이민국으로 연결 전환을 한 뒤 끝이 났다.
‘ 이렇게 여러 곳에 전화해서 실랑이하느니 집에 가서 직접 발송기관 확인을 하거나 아버지한테 다시 서류 다시 확인해 달라고 하는 게 빠르겠다. ’ 어이가 없었지만 시미나는 빠르게 불쾌함에서 벗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행태는 기분이 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탈출한 상태의 사람을 지구인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에 상처받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시미나는 개념을 상실한 사람과 맞닥뜨리고 오늘도 한 걸음 더 성장했다. 그때였다.
고객이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같이 일하는 직원이 개념을 상실했다.
“ 아이 씨 X, XXX XXXX.” 평상시에도 그렇지만, 직장에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상소리라 화들짝 놀라서 옆을 둘러보니 주말팀 나프니아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옆자리에 앉을 때마다 혼자서 중얼거리고 욕설하는 통에 여자들에게는 평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남자들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특별히 성별로 편을 나누거나 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시미나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나프니아가 예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남자 직원들이 입 걸고 성격 더러운 나프니아를 감싸며
“이상한 고객들한테만 그래요”라든가
“ 내가 옆자리에 앉았을 때 잘 모르겠던데”라든가
하는 유의 헛소리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뇌가 청순한 것이거나 귀가 잘 안 들리지 않는 이상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프니아의 성격은 그 정도로 명확했다. 그녀는 남녀를 가리거나 상하를 나누어서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참 일관성 있는 성격이었다.
시미나는 상소리의 출처가 나프니아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또 시작이구나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서 황망한 표정의 모런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 욕설의 원인은 너라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못 본 척 외면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시미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 오늘 나프니아씨 기분이 별로인거 같네요.” 모런은 기다렸다는 듯이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니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냥 다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한 거밖에는 없는데. 동료끼리 같이 영화 보러 갈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모런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제기랄! 잘못 걸렸네! 네가 문제야 네가. 동료끼리 당연히 영화 보러 갈 수 있지. 그런데 그게 나프니아잖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는 나프니아! 내가 저번에 나프니아 좀 이상한 거 같다고 했을 때 너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내가 토씨 하나도 안 빼고 읊어 줘?!’ - 모런은 나프니아 옆에 앉아 괴롭힘을 당한 후 정신이 혼미해진 시미나가 슬그머니 그녀에 대해 언급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감쌌었다 - 라고 그녀의 마음이 소리쳤지만, 생각이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마음의 소리를 물리친 후 상냥함을 가장하고 이야기했다.
“ 당연히 보러 갈 수 있죠,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요? ” 모런은 시미나가 자기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시미나는 업무 시작을 준비하느라 바쁜 척을 하며 나, 네 이야기에 관심 없다는 보디랭귀지를 모런이 이해하기를 희망했지만, 역시나 그는 섬세라고는 거리가 먼 종류의 인간이었다.
“ 저번에 ‘안드로메다 시대’ 영화 보러 가자고 한 거 기억나요? 제가 그룹 초대권 공짜로 받은 게 있어서 여러 팀원한테 보러 가자고 했던 영화. ” 물론 시미나도 기억했다. 여러 사람한테 혼자 가기 싫다고 같이 보러 가자고 권유하는 것도 봤고, 그 영화의 주제 때문에 한동안 커뮤니티가 시끄러웠기도 했지만 시미나도 이미 그 영화를 보고 왔다.
안드로메다는 우주 시대 이전에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밝은 은하로 우주여행이 시작되기 전의 지구의 인간들은, 매우 멀고 인간사회와는 무관한 곳으로 알려진 안드로메다은하에 대해 상상의 우주 또는 예외의 대명사 격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지구인들은 개념이 없고 상식이 통하지 않은 사람들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다는 등의 우스갯소리를 사용했다. ‘안드로메다 시대’는 이러한 안드로메다에 대한 오래된 정의를 이용하여 무개념인 캐릭터들과 일이 통제를 잃고 처음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 사건들을 엮어내어 제작한 일종의 블랙코미디였다.
문제는 예전의 안드로메다에 대한 정의와는 다르게 현재는 멀기는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여행이 가능한 곳이었고, 많은 안드로메다은하 출신이 지구를 거쳐 다른 행성으로 이동했으며 지구에서 유행한 영화가 안드로메다 은하군에 속해있는 행성에 수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안드로메다 출신자들의 항의와 더불어, 영화가 타 은하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지역 차별을 조장한다는 논란이 커뮤니티를 휩쓸었다.
“ 기억하고 있죠. 저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되어서 아쉬웠는데. ” ; 다행히 그때 그녀는 근무 날이라 자연스럽게 그 대화에서 멀어졌었다.
“ 그때 다들 바빠서 나프니아 씨랑 둘이 영화 보러 갔거든요. 그때 영화 시간 괜찮다고 한 사람이 나프니아씨 말고는 없어서 둘이 간 건데, 직장동료인데 둘이 갈 수 있는 거잖아요! ” 모런은 한참을 자기 합리화를 해댔고 중간중간 시미나의 동의를 구해 그녀를 귀찮게 만들었다.
한참을 떠들어댄 이야기의 결론은 시미나의 머릿속에서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려고 결정했을 때 나프니아는 데이트라고 생각해 둘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모런도 이때는 잘해볼 마음이 이었는데, 첫 데이트 이후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미리드의 적극적인 공략으로 그녀에게 홀라당 넘어간 모런이, 차마 나프니아에게 진실을 실토할 자신이 없었다; 비겁함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리드에게도 나프니아와 데이트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꼬투리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끼리 어울렸다고 우기며 한 발 빼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별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나프니아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매우 화가 난 것이다.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의 조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