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늘 상대적으로 흘렀지만 잉여 인간으로 살기로 한 시미나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이 멈추어져 있는 듯한 날들에서도 변화가 인식될 정도로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포근한 듯 선선하게 느껴지던 공기의 흐름도 저녁으로 접어들었을 때도 더운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고 낮의 활력이 밤의 그림자를 더욱 밀어내며 그 존재감을 늘여가는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점점 더 가벼워지고 손에 든 음료수도 차가움과 꾸덕꾸덕함을 내뿜고 있는 아이스 종류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시미나도 자연의 힘에 굴복하여 뜨거운 커피를 포기하고 ’‘ 노란 산 탱글탱글 자두 품은 폼폼 에프 화산 블렌디드’라는 이름도 괴상한 음료를 손에 들고 있었다. 시미나는 절대 이 음료를 주문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근 자주 방문한 상담센터 빌딩 내에 있는 카페의 직원이 “또 오셨네요! ”라는 인사를 건네며, 날씨가 더워졌으니, 아이스 음료가 어떠냐고 상냥하게 추천하는 신메뉴를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카페 바리스타의 알은척 이후에, 이제 이 카페도 발길을 끊어야 하느냐는 고민이 들기는 했지만 30퍼센트 직원할인은 선택을 고민스럽게 했다.
결국 시미나는 카페 직원의 강력 추천 때문에 거절을 거절당하고, 여름 신메뉴를 들고 거리로 나섰고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열기에 땀을 흘리는 음료를 보면서, 맛은 어떨지 몰라도 시원하기는 하겠네 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이름과는 다르게 외향은 매우 그럴싸했다. 샛 노란색 슬러시 위에 에스프레소 커피로 보이는 것이 흘러내리고 꼭대기를 장식한 분홍색 섞인 동그란 아이스크림과 박하로 보이는 풀떼기 장식, 중간중간 보이는 연분홍색 젤리 등, ‘노란색 음료수에 에스프레소로 화산 모양을 만든 건가, 작명 감각하고는’ 하는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하면서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랬다, 예쁜 것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1분 전만 하더라도 훈남 바리스타의 기분 좋은 웃음 공격에 넘어가 제대로 거절도 하지 못하고 제일 큰 사이즈의 괴상한 음료를 주문했다는 자책을 한 주제에,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시미나는 빠르게 태세 전환했다.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더위에 적응하지 못한 몸이, 유자를 베이스로 한 것으로 보이는 음료의 상큼함과 에스프레소의 진한 씁쓰레함이 어울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맛있었다.
새로운 시도는 그게 어떤 것이든 항상 두려움을 낳지만, 시도해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노란 산 탱글탱글 자두 품은 폼폼 에프 화산 블렌디드’라는 괴상한 이름의 음료는 이름이 조금 특이할 뿐인 새로운 최애 음료가 될 것이 확실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무더위로 지쳐서인지 오늘은 문의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지만, 전화를 하는 사람 대부분도 점잖으면서 상식적이었다. 빵빵한 에어컨 아래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쪽쪽거리며 예의 바른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세상이 새삼 살만하게 느껴졌다. 주변 직원들도 다 퇴근하고 시미나의 자리 근처는 텅 비어 있는 상태라, 늘 하루가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 늘어져 있는데 엘리베이터 홀 근처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 뭐야, 진짜 몰상식하게! 무슨 ….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아닌가? ” 중간중간 음성이 끊기고 울려서 들리기는 했지만 분명 미리드의 목소리였다.
‘ 하아, 저 커플들은 사귀기 전에는 조용하더니 연애하자마자 왜 저러는 거야, 문 좀 닫고 이야기하지.’ 시미나가 마음속으로 투덜대자마자 여기서 등장하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 몰상식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나 봐? 이곳저곳 문어발로 데이트 신청하다가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데이트가 아니었다고 발뺌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을 요구하니까 이상한 사람 만드는 게 몰상식이야. ” 평상시에도 차갑고 사무적인 나프니아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때려 박히듯이 더 선명하게 시미나의 귀에 들어왔다.
“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머리는 장식인가 보지? 다 드러난 사실인데 아니라고 우기면 진짜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잘 알아봐! 그쪽도 여자친구가 아니라 또 다른 썸녀일 수 있지. ” 나프니아의 차가운 비꼼에 이성을 읽은 미리드의 고함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한동안 미리드의 찢어지는 듯한 고음톤의 목소리와 낮고 서늘한 나프니아 목소리의 공방이 지속되었고 문 바로 앞에 앉은 터라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이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있었다. 문제의 당사자는 없는 둘의 공방은 당연히 결론이 나지 않고 지속 중이었다.
‘ 왜 관리자들은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나만 이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나? 관리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건가? ’라고 시미나가 머릿속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와 함께 새로운 목소리가 합류했다.
“ 나프니아씨, 제가 저번에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잘 설명했잖아요. 그 일은... 알겠다고…. 전 잘….” 새로 합류한 모런의 목소리는 갈수록 줄어들어 알아듣기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내용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져 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을 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시미나의 몸이 문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 그래서, 진실이 뭔데? 이 치정 싸움의 끝은 도대체 어디야! 진짜 그냥 썸만 탄 건데 이 난리가 난 거야? ” 시미나는 자기의 무의식이 뇌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훌팩이었다. 그녀는 메모장까지 집어 들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 중이었다.
“ 내가 이 맛에 여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니까. ”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너무 열심히 구경하는지라 시미나는 ‘이거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에 잠시 알쏭달쏭했지만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다.
‘ 내 일도 아닌데 상관없지! 불편한 누군가가 이야기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모런의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대화와 미리드의 다그치는 소리, 나프니아의 비꼬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관중들을 더욱 끌어모으고 이 일을 모르던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게 했다.
“ 손은 왜 잡고, 포옹은 왜 한 거야! 직장동료와 영화만 보러 갔는데 할 수 있는 일인가 봐? ” 나프니아의 짜증스러운 소리가 들리자마자 시미나는 훌팩과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뒤로 이어지는 미리드의 고성과 모런의 웅얼거리는 소리는 관리자의 고함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 거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휴식 시간 끝났으면 얼른 착석해요! ”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그제야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는지 팀장 중 한 명이 짜증을 내며 다가왔고,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직장 막장극을 찍던 연인들은 흩어졌다.
여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