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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Dec 24. 2020

#03.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 열린 책들

도서관의 세계문학 서가에 눈길이 갔다. 시작부터 부담 갖지 않으려 얇고 표지가 예쁘다는 단순함에 <어느 작가의 오후>를 선택했다. 실수였다. 문장이 어렵다. 이해한 척 슬쩍 넘기려고 했다. 나의 무지라고 보기엔 화가 났다. 해석이 동반되어야 하는 문장들은 반갑지 않다. 그러나 묘한 매력에 빠져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오전에 글 작업을 마친 작가가 집을 벗어나 시내로 향하고, 스치는 풍경과 사람과 머문 자리를 하나하나 스케치하듯 묘사를 한다. 시내에서 잠시 머물다가 불을 켜 놓고 나갔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반나절 정도의 일들(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잔한)이 한 권에 들어있다. 집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걸음 하나를 옮길 때 보이는 작가의 내외적 이미지들이다.  


주인공이 알려주는 대로 풍경이나 분위기를 떠올리며 활자를 따라갔다. 엄청난 상상이 필요했다. 주변 풍경을 세세히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떠올려 보라고 한다. 너무 친절해서 생생하게 떠올릴 만도 한데 나는 막혔다. 상상력 부족 탓을 했다. 다가갈 수 없는 걸음에는 멈추어 쉬었다. 철저한 관찰자가 되어 작가를 따라가지만 그의 시선과 맞닿아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문화적 배경 지식 부족이겠다.)


지근거리의 풍경을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대단한 투시력으로 먼 거리를 내다보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뒤죽박죽. 작가의 현실이 갑자기 환상으로 바뀌는 시점도 있고 대인기피증에서 오는 망상도 펼쳐진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문장의 길이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현실, 환상, 망상을 넘나드는 표현을 작가의 자유로움이라 납득시키는 듯한 문장을 읽고 혹시, 주인공 '작가'가 저자 페터 한트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작가의 오후 p40>


문장이 어렵다고 느낀 이유는 시적 표현이 많기 때문이었다. 함축된 의미를 해석하면서 소설 마지막 문장을 마치고 바로 역자의 해석을 읽었다. 정답을 맞혔다는 짜릿함이 밀려왔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페터 한트케는 자신의 글쓰기와 그것으로 치르는 대가, 자신의 삶, 즉, 집중적인 글쓰기 작업을 한 후에 남아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내용은 책 속 작가가 시내에서 만난 번역가의 입을 빌려 전한다. 


나의 심상은 (...)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원본과 같은 형태로 내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소. 그 원본은 시간이 지나도 닳지 않고, 그곳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나는 지나간 모든 것만 따르고, 그것에 몰입하여, 지체 없이 종이 위에 옮겨 온 거요.  (...) 내가 알기로는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유독 나만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그것도 날마다 날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텍스트가 있는데 나만 빈손인 거야.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무감각한 문장으로 이미지도 리듬도 없이 꿈이 끝나 버렸을 때 나는 영원히 글쓰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오.
<어느 작가의 오후 p107~> 


번역가가 되기 전 작가였던 시절의 심리와 번역가가 되고 나서 삶에 더 만족하는 상태를 글로 만났다. 번역가가 되기 전, 작가 시절의 삶에 저자 한트케의 진솔함이 투영된 것 같다. 그간 출판사와의 여러 차례 미팅이나 메일 소통은 '저자'가 될 수 있을 거란 꿈을 꾸게 했다. 다섯 쪽에 달하는 번역가의 말을 세 번 읽었다. '저자'가 되고 싶은 나는, 꿈에서 깨어야 할지 모른다는 오래된 현실적인 물음에 텍스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더했다. 저자라는 삶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번역가처럼 만족하는 제2의 삶을 찾을 수 있을까? 


페터 한트케는 자신이 옳다 여기는 방향으로 문학 작품 활동을 꾸준히 했다. 모색과 변신을 거듭하며 소설, 희극, 에세이, 동화 등 분야를 넘나들었다. 호평도 혹평도 그에게는 양분이었다.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한트케가 말하는 '자기만의 텍스트'를 잃지 않는 기본과 '무감각한 문장'을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이겠다. 내가 유지하는 삶이 단순히 유지만 되어서는 충분하지 않음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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