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결혼과 함께 미국에 온 우리 부부에게 여름은 해마다 가장 설레고 행복한 계절이다. 한 사람은 캘리포니아 어바인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시카고에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지내며 약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장거리 신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6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긴 여름방학 동안만큼은 오롯이 함께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여름은 더욱 특별하다. 어느덧 세 번째 시카고의 여름을 마치고 어바인으로 돌아온 지금, 늦기 전에 이 소중했던 순간들을 글로 남겨두고자 금요일 밤 저녁 노트북을 연다.
이번 시카고 여름은 컨셉은 현지인의 삶이다. 작년까지는 '언제까지 있을 지 모르는 시카고를 최대한 즐겨보자'라는 관광객의 모드였다면 이번 여름은 적응을 완료한 현지인의 모드였다. 더욱이 새롭게 자리잡은 Laekview라는 동네는 다운타운과는 조금 떨어진 탓에 시카고의 일상 라이프를 즐기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우리가 새로 이사한 집에 대한 이야기다. 새 집을 찾던 당시, 어바인에 머물고 있던 아내는 많은 집주인들이 직접 세입자를 만나길 원해 쉽사리 집을 구하지 못했다. 연이은 거절에 지쳐 있던 그때, 유일하게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응답해 준 집주인이 있었다. 덕분에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됐고, 지난 겨울 우리는 짐을 챙겨 함께 시카고로 향했다.
새 집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단연 미시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뷰였다. 첫 입주 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장관에 우리 둘 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후, 혼자 시카고에 남게 된 아내는 그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긴 겨울을 한결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여름의 풍경은 겨울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생동감 있었다.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들은 마음을 맑고 평온하게 해주었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숫가를 따라 조깅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반려견들은 그 풍경에 다채로움을 더해주었다.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뷰를 바라보며 라떼와 빵을 나누던 그 짧은 시간은, 어바인으로 돌아온 지금도 가장 그리운 순간이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호수 바로 옆에 살게 되면서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노력했다. 직장인인 아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웠던 나는 점심을 먹은 뒤 강가를 산책하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 산 캠핑 의자를 들고 호숫가에 앉아 책이나 논문을 읽곤 했다.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던 시간을 보상하듯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호수 주변으로 나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즐겼다. 특히 평일 낮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곤 했다. 어쩌면, 그들도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재택근무를 주로 하는 아내가 일을 마치면 나는 그녀를 재촉해 강가로 함께 나가곤 했다. 집순이인 아내가 내가 없으면 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러 좀처럼 나오지 않을 걸 알기에, 함께 있을 수 있는 동안 하루라도 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특히 나는 아내와 함께 조깅을 하고 싶었다. 사실 이것은 장모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를 뛰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양한 이유를 대며 나의 제안을 피했고, 특히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은 나에게 “너, 미국 직장생활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는 그녀의 한마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치트키’ 같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다섯 번 정도는 함께 뛸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200미터마다 멈추려는 아내를 달래는 것은 병원가기 싫어하는 아기를 달래는 것과 같았지만, 매일 강가를 따라 걷거나 뛰었던 저녁 시간은 지금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시카고 여름의 컨셉이 '현지인의 삶'이었던 만큼 시카고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일상을 즐기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여러 가지 우연을 통해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덕분에 얼바인에서보다 좀 더 미국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영어가 아직 완벽하진 않다 보니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는 아무래도 스포츠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여름에는 보름이와 함께 피클볼을 시작했다. 테니스인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피클볼의 인기는 정말 대단하다. 주말마다 피클볼을 치고 그 바로 옆에 있는 로컬 브루어리에서 맥주 한 잔 하며 주말을 보내는 것이 거의 루틴이 되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브루어리는 매주 새로운 맥주 메뉴를 선보였다. 특히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20oz 맥주를 5달러에 즐길 수 있는 해피아워가 있어 맥주 애호가인 나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현지인의 삶도 좋지만, 가끔은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는 것이 더 큰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어느덧 매년 여름 여행의루틴이 된 애틀랜타와 뉴욕이 바로 그런 곳이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8월과 9월 사이에 애틀랜타와 뉴욕+뉴저지를 여행했다. 두 도시를 2년 연속 찾게 된 이유는 그곳에 우리의 지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는 아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유일한 한국인 선배가 있다. 한편, 애틀랜타에는 아내가 고등학생 시절 미국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호스트 가족이 거주 중이다. 모두 아내를 통해 인연을 맺은 분들이지만, 2년 연속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 역시 이제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애틀랜타의 호스트 가족은 정말 대가족이다. John과 Jane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주 큰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아래 세 명의 딸들이 농장 부지 안이나 근처에 각자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저녁이면 온 가족이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이제는 손자, 손녀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어,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이런 가족형태가 흔치 않아서인지, 애틀란타를 방문할 때마다 가족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점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족의 중심을 든든히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을 항상 살피되 간섭하거나 조언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따뜻하게 응원해주신다. 쨋든 아내와 새가정을 꾸리는 입장에서, 또 은퇴를 앞두고 계시는 양가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좀 더 잘해야 겠다는 책임감이 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색다른 경험은 처음으로 연극 리허설을 직접 본 일이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첫째 딸 Laura의 막내아들 Steven이 초등학생들과 함께 〈피터팬〉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리허설은 거의 실제 공연처럼 진지하게 진행됐다. 어린 아이들이 대사를 다 외우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에 정말 놀랐다. 미국 친구 말로는 연극을 하는 아이들이 조금 마이너한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부모가 될 나이라 그런지 그럼에도 그런 활동이 아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꼭 연극 같은 걸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해주자고 다짐했다.
애틀랜타를 다녀온 지 2주쯤 지나, 이번엔 뉴욕 여행을 떠났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뉴욕 방문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선배 커플과 함께 뉴욕시에서 차로 약 2시간 떨어진 Catskill이라는 근교 지역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우리는 Airbnb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집에 들어간 지 10분쯤 됐을까. 갑자기 커다란 흑곰이 집 앞 마당을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숙소는 거실 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정말 눈앞에서 곰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도 동물 관련 사고 영상을 자주 보다 보니, 나는 본능적으로 온갖 안 좋은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밖에 나가도 괜찮을까?’ ‘혹시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그에 반해, 평소 호기심 많은 아내는 마치 강아지를 본 것처럼 들떴다. 아무래도 이 집이 Airbnb로 운영되다 보니, 사람들이 음식물을 밖에 버리는 일이 잦은 모양이다. 그래서 곰이 종종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큰맘 먹고 온 여행이니, 숙소에만 있기엔 아쉬웠다. 그래서 용기를 내 밖으로 나갔고, 조금씩 긴장을 풀며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지금 시카고의 순간을 돌아보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다행히 그 이후로는 곰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비큐를 하던 중에 곰이 다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만 오히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곰을 만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Catskill에서 하이킹도 하고, 정통 유대교인 하레디 커뮤니티를 우연히 지나가기도 하고, 프리스비도 하고, 도미, 스테이크 같은 맛있는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으며 선배 커플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에는 어바인에서 함께 축구를 하며 친해졌던 Andrew를 만났다. 뉴욕에서 새롭게 일자리를 구한 그와 Christine은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밖에서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고, 그의 집으로 돌아와 Andrew가 직접 만들어준 칵테일을 마시며 거의 자정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미국 곳곳에 친구들이 있다는 건, 여행을 할 때마다 특별한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이런 특별한 이벤트들 외에도, 손흥민의 LAFC 첫 경기를 직접 관람하고, 미국 야구를 처음으로 보러 간 일 등 생각해보면 참 많은 경험을 했다.
어찌 보면 외롭고 고된 여정인 박사 과정에서 새로운 추억을 함께 쌓아갈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무엇을 했는지가 물론 중요하지만, 과정 자체가 행복하고 즐거웠기에 모든 경험이 더욱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 그 소중한 기억이 또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주기도 하고.
행복했다. 2025년 시카고의 여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