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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Mar 21. 2022

호수효과

8

 저녁도 거른 채 호텔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몸에서 잊고 있던 냄새가 났다. 청소미화원이 호숫가 쓰레기장 드럼통에 피워둔 불을 쬘 때 배 인 것 같았다. 국민학교 시절 엄마에게 성당에 교리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곤 친구들과 종종 땡땡이를 쳤다. 겨울에는 성당 근처 공터에서 불장난을 하기도 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신기하게도 불장난을 할 때마다 알아차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몸과 옷에 밴 냄새가 너무도 확실한 증거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제 집에 들어가. 내일 세례식이겠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며칠 밖에 안됐는데 몇 달이나 지난 것 같아. 진짜 보고 싶어.’


남편에게 답장을 하려는데 지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호스텔에서 파티중인데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저녁을 안 먹었으면 얼른 오라고 했다. 나는 지수가 알려준 호스텔 주소로 우버를 잡아타고 갔다.

 

 지수를 따라 들어간 호스텔은 마치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기숙사 같은 분위기였다. 널찍한 테이블 주위로 소파가 둘러싸고 있었고 한편에 있는 당구대와 탁구대에서 게임이 진 행 중이었다. 벽 한쪽을 가득채운 책장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여기 있는 책들은 다녀간 사람들이 기증한 것들이래요. 한글로 된 책은 여행안내서 같은 것 밖에 없더라고요.”


 지수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자 레게머리를 한 백인남자와 자매로 보이는 라틴계 여자 두 명 이 앉아있었다. 다 비워진 그릇에 내 시선이 꽂히자 백인남자와 키가 큰 여 자가 주방으로 들어갔고 지수가 그들을 따라갔다. 남아있던 귀엽게 생긴 여자가 새 플라스틱 컵을 꺼내서 나에게 와인을 따라주다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매력적인 얼굴이네요.”


 주방에 들어간 세 명이 각자 무언가 하나씩 들고 나왔다. 지수의 그릇에는 익숙한 불고기가 있었다. 레게머리 백인남자의 접시에는 조개껍데기 같이 생긴 파스타와 구운가지가 보였고 마지막으로 여자가 내려놓은 프라이팬에는 오일 속에 빠진 칵테일 새우가 있었다. 오늘 요리 경연의 컨셉은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국의 음식을 만들기 라고 했다.


 레게머리 백인남자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그가 사는 볼차노는 오스트리아와 가깝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 남자와 전혀 다른(머리스타일도 그렇고) 느낌이었다. 취기가 오르자 나중에 자신이 이탈리아 대통령이 될 거라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중에 선거 운동할 때 지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남아있지 않길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자매라고 짐작했던 여자들은 알고 보니 커플(!)이었다. 그제야 귀엽게 생긴 여자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볼 때마다 키 큰 여자가 불편한 표정을 지은 게 이해가 되었다. 둘은 바르셀로나에서 온 건축학도들로 미국 주요도시 건축답사 여행 중이라고 했다. 건축에 문외한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시카고의 도시 형태와 스카이라인에 대해 설명하며 논쟁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커플이전에 열정적인 예비 건축가의 모습이었다.


 자정이 다 돼서야 파티가 끝났다. 내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지만 키 큰 여자는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라며 배려해 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연인에게 잠시 할 말이 있다며 위층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귀여운 여자는 나에게 작별인사로 윙크를 하고 키 큰 여자를 따라 올라갔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지수와 레게머리 남자가 로비까지 배웅 해주기 위해 따라왔다. 레게머리 남자는 나중에 자신의 취임식 때 국빈으로 초대할 테니 연락처와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카운터에서 호스텔로고가 박힌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그는 건네받은 메모지를 슬쩍 보더니 나를 껴안았다. 그에게 베이비로션 냄새가 났다. 포옹을 푼 남자는 설거지 거리가 많다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루카한테서 베이비로션 냄새가 나는데요?”


“샤워를 하고 베이비파우더를 뿌리거든요.”


“농담하지 말아여.”


“정말인데... 그건 그렇고 진짜 한국주소를 적어준 거예요?”


“부모님 집 주소에요. 이십년 뒤에 정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쯤이면 그 집에서 살고 있을 것 같아서요.”


“루카가 알면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아! 내일 세례식 몇 시까지 가면 되나요?”


“미안한데 안와도 되요... 사실 그 말 하려고 왔어요.”


“아... 그렇군요... 기대했는데...”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었던 거 같아요. 내 세례식도 아닌데...”


지수는 나의 말속에서 숨은 뜻을 알아차린 눈빛을 띄었다.


“그럼 이제 정말 작별이네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SUV 한대가 호스텔 앞에 멈췄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흑인 여자가 어색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차에 올라타고 창문을 내려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족관 어두운 방에서 벨루가를 쳐다보던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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