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전반부를 다 살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나를 위해 살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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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난 대충 남들 하는대로 살아왔다. 크게 잘 나지도, 대단한 문제아도 아닌, 그저 병풍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만 같은 존재. 걱정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대부분 혼자 삭혔고, 반항심이 있긴 했어도 행동으로 엇나가진 않았다. 운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친구들 중 딱 중간 정도 시점에 결혼을 했으며, 두어번 이직을 했지만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기회를 잡은걸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른 즈음부터 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끝도 없는 외로움에 시달렸고, 어느 새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지를 고민할 만큼 깊은 우울에 빠졌다. 마치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조종받는 로봇처럼 무얼 해도 감흥이 없고,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마치 벽 너머 남 일을 바라보듯 무덤덤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과 사소한 일로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마음에는 잔뜩 가시가 돋혀 있었고, 힘들수록 내가 할 수 있는건 센 척, 당당한 척 버티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경쟁에서 살아남는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직장에서도, 인생에서도,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무너져 내린건,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도, 곧바로 이어진 아빠의 재혼도, 남편의 사업 위기도 아닌, 아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한 직후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워킹맘에 외동이니 또래에 비해 학습이든 성격 발달이든 조금 늦을 수 있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아들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남편의 세 치 혀는 말 그대로 비수가 되어 가슴팍에 날아들었다.
"엄마가 얼마나 아이한테 관심이 없으면 이런 문제를 아빠인 내가 먼저 알게 되는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일하고 출세하기 바빠 아들을 뒷전으로 할껀데?"
그 날 나머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난생 처음 무단 결근을 하고는, 미친 사람처럼 정처 없이, 집에서 가까운 한강 다리 위를 서성이며, 서 있을 힘조차 없어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던 것 같다. 그저 아들을 남 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결혼하고 10년 넘도록 생계를 책임지는건 오롯이 내 몫이었기에, 낮에는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고 밤에는 아이의 오랜 잠투정으로 지치고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던건데. 출세하느라 바빴다니, 내 인생을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맹세코 난 회사에서 잘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욕 먹기 싫어서, 무시당하기 싫어서, 꾸역꾸역 버텨온 것 뿐이었다.
말로 얻어 맞아도 실제 몸이 아프다는걸 처음 알게 되었다. 명치끝이, 머리가, 아니 온몸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나아지기 시작할 무렵, 미련없이 직장을 나왔다.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고, 내 것이 아니었다. 훌훌 털고 나오면 그만인줄 알았던 명함이 막상 없어지고 나니, 나 자신이 무척 초라했다. 어렵게 쌓아올린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 폐허를 앞에 두고, 한참을 더 울었다. 내가 이렇게 끝도 없이 울 수 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눈물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목이 쉰 채로 몇 달을 더 보낸 후 병원을 찾으니, 차트에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대인기피증, 우울증, 불면증 등 온갖 병명이 새로 달렸다.
약을 한 움큼 받아들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 했다.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했던, 그러나 고작 57세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했던 엄마를 위해서라도.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난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자주 웃고, 행복한 순간을 자주 누리고 있다. 물론 잘 나가는 고액연봉자가 된 것도, 아이가 드라마틱하게 성장을 이룬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주머니속 불룩 튀어나온 네모난 돌처럼 사는 것이 그저 불편했다면, 이젠 생긴대로 자연스럽게, 동글동글 편안한 인생이 되었다고 할까. 놓기 싫었던 것들 -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잘 나간다는 평판, 다른 잘 나가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 을 모두 떠나 보내고, 대신 자유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 평가에 신경쓰는 대신, 나 자신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된 자유. 그렇게 찾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매일 단 몇분이라도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걸 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
마음이 맞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쏟고 그들과 함께 소속감을 느끼는 것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게 하는 일과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걷어내는 것
이렇듯, 나답게 사는건, 일차적으로 매일 잠깐씩이라도 나 자신만을 위하는 충전의 시간과, 이렇게 충전된 '나'를, 나의 정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집안 일 혹은 회사에 쏟아내는 과정의 반복을 뜻한다. 충전은 취미를 통해서 할 수도 있고, 명상이나 운동,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누는 것 등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걸 하면 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 폄하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면 넷플릭스, 또는 SNS를 하는 것,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고 있는 것 모두 괜찮다. 무엇이든 나의 에너지를 채워주기만 하면 그것이 그 순간 나를 위한 최선의 충전이다.
타인에게 정성을 쏟고 뜻을 함께 한다는건 소속감을 주기도 하지만 인생의 소명이 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 나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렇듯 보람 있는 과정이지만, 대부분의 성장 과정이 그러하듯, 발전은 매일 꾸준히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변함 없이 지루한 '정체'를 오래도록 인내한 끝에, 순식간에 잠재력이 폭발하는 '도약'을 반복하는, 즉 계단식으로 일어난다. 정체의 시기 동안 지치지 않으려면 백프로 방전되기 전에 위 과정을 통해 마음의 리저브를 조금 챙겨두는 지혜가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는 '나답지 못한 일'을 거절하는건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돈, 명예, 혹은 가족 등을 위해 죽도록 괴로워도 하기 싫은걸 목적 없이 참고 인내하지 않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답지 못한'걸 참지 않는 자유는 이러한 자기결정권의 핵심이다. 스스로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또는 체력적이든 정신적이든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약간의 불편을 참는건 괜찮지만, 이 때에도 반드시 내 선택에 의해 참는 것이어야만 한다. 어쩌면 나답게 사는 인생을 방해하는 일이나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제거하는건, 나를 충전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보다 행복을 좌우하는 더 중대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답지 못하게 살도록 만드는' 일과 사람들로부터 영구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벗어나는 법을 이야기하며 글을 끝맺을까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하는 굉장히 많은 선택은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구조조정이 아닌 자의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 대부분, 결정적으로 상사, 동료, 클라이언트 등 일하면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못 견뎌 떠나게 된다. 우울증이나 강박증에 걸린 많은 사람들도 어릴적 '사람'한테 받은 트라우마가 마음속 깊이 자리한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든,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숙명이다. 좋은 사람을 곁에 계속 두기 어렵듯, 싫은 사람과 단호히 작별하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전 직장을 나오면서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된 깨달음은, (1)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과, (2) 아름다운 헤어짐은 없다는 것이다.
친정엄마가 말기암으로 고통받을 때의 일이다. 암 선고를 받기 전 엄마는 젊고 고우셨고, 또래에 비해서도 동안이셨다. 누구보다도 아빠와 자식들을 사랑하셨으며,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세 달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조차 않을 만큼 괴로웠고, 실제 10년이 지난 지금,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나오는것과 달리, 임종 직전 암환자들은 온몸에 링거와 콧줄 등,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며, 몸무게도 평상시의 반 밖에 나가지 않는다. 옴푹 들어간 양볼과 항암제로 검게 착색된 피부, 넘어지거나 긁힌 후 몇달이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도 군데군데 있다. 죽도록 사랑하면 임종 직전까지 그 모습이 아름답고, 작별인사도 낭만적이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너무도 다르다.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플라토닉한, 이해관계라고는 얽힌 것이 하나도 없는, 목숨처럼 사랑했던 엄마와 헤어질 때에도 '아름답지' 않았는데, 사귀던 애인,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상사와의 헤어짐이 서로 여운이 남는 아련한 것이 될꺼라고는 애시당초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러니 좀 질척거려도 괜찮고, 추한 뒷모습을 보여도 상관 없다. 내가 똑바로 살았다면 서로 가장 어려운 마지막 뒷모습만을 보며 상대가 나를 판단하지 않을거고, 나 역시도 십년쯤 지나고 나면 고통스러운 이별보단 좋았던 추억들을 되새기게 될테니까.
어떤 이유에서건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마주하는 동료, 또는 남편이나 아들처럼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나에게 도움되지 않는 관계를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도 덩달아 달라졌다. 나 자신도, 주변 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들 모두 나름의 고충과 욕망이 있고, 대부분 나름대로 더 나은 인생을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선량한 사람들이라는걸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러다보니 상대를 의심하거나 탓하는 일이 적어졌고, 이따금씩 느끼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더 솔직해졌다. 내가 죽든, 상대가 죽든, 각자 인생의 흐름에 이끌려 언젠가는 서로 더 이상 보지 않을 사이가 되든, 나를 죽도록 힘들게 하는 관계도, 나를 황홀할 만큼 행복하게 해주는 관계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살다 보니 더 없이 포근한 마음의 위로가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내가 잠시 머무르는 찰나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어떤 일이나 관계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떠나가게 되어 있다는 깨달음 덕에, 역설적이게도 난, 오늘 하루를, 지금 이 순간을, 일분 일초 소중히 아껴가며 나를 가장 충만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