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로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끝나는
어그로 세상에 말투 하나로도 고민 많은 인간 한 명이 여기 있다. 여러 시나리오를 돌려도 예상치 못한 dm과 댓글이 올 때가 있다. ’ 감수성이 부족한 거 아니냐, 검토해 봤냐,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혹은 ’ 이렇게 해야 된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 그건 부족하다.‘처럼 다수의 비평, 평론이 등판하기도 한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버겁다.
작은 것 하나로도 지적하면서 시도해 보라는 말이 공존하는 요즘. 모두가 몸 사리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여론이 매섭고, 매크로 마이크로 상관없이 지적하고 문제점 찾으려고 모두가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올라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달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과거 몇 번의 선택의 기로를 떠올려본다. ‘컨설턴트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라는 제안에 아는 것 없이 용감 무식하게 ‘저는 플레이어이고 싶습니다.’라고 답한걸 떠올리며 한숨을 한번 쉰다. ‘다른 파트 헬스케어 서비스기획으로 전환되면 어떨 것 같냐?’는 말에 ‘제가 지금까지 이 파트로 전문성을 키워왔기 때문에 회사에서 제게 면접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요?’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답을 했던 때도 종종 생각나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
뭐가 그리, 왜 그리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고 플레이어이고 싶다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그렇게 한참을 수차례 앉아서 생각을 해도 그래도 나는 직접 하는 플레이어가 좋다. 잘 못할 때도 있고 입방아에 오르고 수치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벌벌 떨면서 자기 것을 선택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세상이 말하는 문법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굳이 자기만의 무언가를 해보겠다며 시도하는 그 사람들이 결국 우리 삶을 다채롭게 해 준다. 그 플레이어들의 살아있음이 좋다. 정도와 톤의 차이는 있지만 옅어도 가늘어도 짊어지고 가겠다는 그 맑눈광들이 좋다.
스스로를 용감하다거나 뭘 극복했다, 더 과감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지금껏 없다. 오히려 저거 멋있다, 하고 싶다에 반해서 좋아하는 것을 추종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선택의 갈래에 있거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좋아하니까, 원하니까 다시 심기일전하고 방법도 찾고 그랬던 게 아닐까.
이것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원래 사람이 한 치 앞을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오랜 시간 앉아있었지만 같은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나선다. 아직은 어쩌고 저쩌고 해도 그래도 플레이어 하고 싶다고. 맛있는 만두나 하나 사서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