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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로 가는 길

국가주의로 가는 길


규제는 규제를 낳고 개입은 더 큰 간섭 불러
한국 경제 나홀로 역주행은 국가주의 탓
개인의 자유 제한 말고 시장 활력 돋워야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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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로 가는 길이 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많아지면 그렇게 된다. 정부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을 강행하는 것은 국가주의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실업자가 늘고 자영업자가 몰락하자 다시 자영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임대료를 통제하고, 카드 수수료와 프랜차이즈 가맹비를 인하하려고 한다. 정부 간섭 증가다.



이런 정책들을 시행하면 이제는 임대시장에서, 카드회사에서,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임대시장에서는 임대 상가 공급이 줄어 오히려 임대료가 더 올라가고,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도록 강제하면 임차할 상가를 찾기 어려워져 장사하는 사람들은 더욱 고통을 받는다. 그러면 다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또 정부가 개입하고 종국에는 세금으로 상가를 사서 싼값에 임대해 주겠다는 정책까지 나오게 된다.




또 카드 수수료와 프랜차이즈 가맹비를 줄이면 카드회사와 프랜차이즈 본사의 수익이 줄어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는 회사가 생긴다. 그러면 실업자가 늘고, 정부는 늘어난 실업자 문제를 해결한다고 세금으로 기업들의 손실을 보전해준다거나 기업을 인수해 정부가 운영하려고 한다. 규제는 규제를 낳고, 정부의 개입과 간섭은 더 늘어난다.




만약 정부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민간의 경제활동에 간섭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사회주의처럼 정부가 모든 기업과 국민에게 명령과 지시를 내리는 일이 벌어진다. 정부 개입이 늘수록 개인의 자유는 줄어들어 국가주의 성향은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로 변모해가고 있음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 개별 기업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게 된 것,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단속하는 것, ‘먹방(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송)’을 규제하겠다는 것 등에서도 나타난다.



[정책의 맥] 인터넷銀, 시중은행 수준 규제는 곤란






각국의 역사를 보면 발전과 번영은 정부의 간섭 정도와 반비례한다. 정부의 간섭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국가는 쇠퇴하거나 망했다. 반면 정부의 간섭이 적고 개인의 자유가 많을수록 번영과 풍요를 누렸다. 지금 한국 경제는 일자리 파괴, 자영업자 몰락, 기업 도산 속출, 중소기업 해외탈출, 기업 투자 감소, 빈곤층 소득 감소 등 총체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는데 유독 한국 경제만 역주행하고 있다. 이것은 과다한 정부 개입과 결코 무관치 않다.



지금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할 때 시장경제의 핵심인 ‘사유재산’과 ‘경쟁’을 드러내놓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유재산과 경쟁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고,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기업가가 불공정 행위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이를 단호히 막아야 하며,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가 명령과 규제로 자본가와 기업가의 활동을 억제하고 간섭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정책이라면 실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책들을 고집하는 것은 정부의 간섭이 늘어났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잘 모르는 지식의 결여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부 정부 관계자와 현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이 ‘국가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인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국가주의가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들은 국가주의와는 관계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정부 개입을 늘려 가면 국가의 권력이 커져 국가주의 사회로 가는 것은 분명하다.


국가주의를 우려하는 이유는 경제가 쇠퇴하는 것은 물론 그런 사회는 대중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는 정부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그들과 관련이 있는 소수그룹만이 이익을 본다. 그렇게 되면 구성원 간 갈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져 국가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 그런 사회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도 국가주의 사회로 가는 메커니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해지는 제도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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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82312531


자유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왔을까?

자유 민주주의를 알려면 개인주의를 알 수 있어야 하고 개인주의를 통해 소유권의 개념이 나오고 그것이 자유로 이어지며 자유는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래서 이러한 뿌리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인과 집단이라는 개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제도와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제도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헌법은 어디서 나왔을까?

우리나라의 헌법은 미국의 헌법을 따랐고 미국의 헌법은 영국을 따랐고 영국은 독일의 헌법 그리고 독일의 헌법은 마르틴루터에 의해 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헌법을 알며 헌법에 중요하게 표시된 개인의 존귀함과 자유의 가치 그리고 그것에서 퍼져아온 소유의 개념과 소유가 발전시킨 자본주의를 알 수 있다.


쿠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그리고 독일어 번역본을 찍어냈다.

그리고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


중세의 사람들은 그전까지 신부가 하는 라틴어 미사를 통해 성경을 말씀을 전해 들었고 그 뜻이 무어냐 물어보면 성당에 돈 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줄 알았다.

그런데 대중화된 구텐베르크의 성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그 시절 로마카톨릭은 면벌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통해 부를 축적하던 교황은 마르틴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때문에 곤란에 처한다.

면죄부를 사면 천국 간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로마카톨릭은 왜 몰락했는가?

지금 잘 보면 카톨릭을 믿는 나라는 남미, 이탈리아, 포루투갈, 스페인 등 경제적으로 몰락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잘 사는 나라들은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등등 잘 사는 나라들이다.


사람들은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중에 프로테스탄트를 더 많이 믿었고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나라들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는가?


로마카톨릭의 구원론은 개인을 인정하지 않고 노예를 만들어냈고 성경을 통한 구원론에서는 개인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신27:26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롬4:14


내가 성경을 인용할줄 몰랐다.


이 내용은 무엇인가?

바울이 여기서 노예와 자유인을 대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조하는가?

바울은 할례당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대조한다.

바울은 주장하기를 할례당의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맞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할례당의 복음이 틀렸다고 하는가?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을 받을 때 할례당의 복음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므로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위를 할 필요 없고 믿음만 있다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얘기는 무엇인가?

로마카톨릭은 행위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며 개신교는 성경에 나온 말씀에 따라 믿음만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의 구원론은 노예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고 성경을 통한 구원론은 자유인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 된다.


그렇다면 노예와 자유인은 어떻게 다른가?

노예는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안 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시키고 안 시키고가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카톨릭의 구원론은 어떠한 행위를 준다.

그래서 그 행위를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면죄부와 같은 것이다.

너는 아무리 믿어도 원죄가 있어도 지옥을 가는데 이 면죄부만 사면 너는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믿지 않아도 면죄부를 사는 행위만 있다면 바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믿는 사람은 지옥가고 안 믿어도 면죄부만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 안 사면 지옥가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율과 강요에 의한 구원론이니 지옥엘 간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이 절대 자유인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노예만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한 구원론에서의 개인은 기본적으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인은 선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심지어 선에 관한 것도 강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이 선택한 선을 많이 베풀어도 선에 대해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의 구원론은 행위를 하고 나는 이만큼 행위를 했으니 구원을 달라는 댓가가 있는 구원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이 성경에 의한 구원론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로마카톨릭이 무너진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로마카톨릭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두 개가 생겼다.

하나는 로마카톨릭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이렇게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택한 프로테스탄트가 성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것도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무너진다.

그전에는 교황이 왕노릇하고 대다수의 신도는 노예 노릇하던 것이 무너졌다면 절대왕정은 왕이 왕노릇하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노예노릇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이 시민혁명을 일으키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다.

그 논리는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런데 왜 네가 왕노릇하고 우리는 왜 노예 노릇하느냐? 너는 필요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시민혁명의 자유인 논리다.


그럼 그 프로테스탄트들은 누구 인가?

바로 근대적 시민이 프로테스탄트다.

그러면 왕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누가 차지했을까?

바로 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 법치주의다.

그러니 헌법은 이런 근대적 시민의 혁명으로 인해 법치주의가 시작 된 것이다.

그래서 평등의 의미는 법 앞에 평등이다.

대통령도 일반시민도 법 앞에서는 존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해지는 세상을 말한다.


이것을 정치에 대입하면 자유 민주주의가 되고 이것을 경제에 대입하면 자유시장 시스템이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것이 극우로 가면 나찌즘, 파시즘이 되고 극좌로 가면 공산주의가 된다.

이 극우건 극좌건 둘 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노예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왜 노예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인가?

공산주의는 개인의 의식주를 누가 해결해주나?

바로 국가가 해결해 준다.

그렇다면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바로 주인과 노예가 된다.

왜냐하면 국가가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데 개인이 말 안 들어? 이런 것이다.

그러니 국가가 시키는 일만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직업, 사는 곳도 모두 국가가 정해주기 때문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완벽한 노예가 된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국가에 개인이 의존을 하면 할수록 개인의 자유는 박탈 당하고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 민주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대적 개인의 산물이고 이것은 원래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주의는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 가르치는 개인이란 무엇인가?


'나는 개인 나는 집단에 한 부분 한 세포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고 나는 이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하나의 독립된 개인이다.

나의 운명은 나 스스로 결정한다.

나는 나 스스로 철저히 선택권을 가진다. - 자유인은 선택권을 가진 것이 개인이다.

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집단을 위해 희생을 당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선택으로 집단을 위해 희생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극좌, 극우의 정치체제는 집단을 강조하고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을 강조한다.

그래서 집단을 강조하는 집단은 개인의 가치를 부정한다.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개인의 결정을 부정하고 독립된 개인을 철저히 부정한다.

그래서 집단을 강조하는 집단의 위험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공동체와 좋지 않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바로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모여 개인의 가치실현을 추구하면 그것은 좋은 공동체가 되며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해치면 그것은 좋지 않은 공동체이다.


좋지 않은 공동체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가?

극우로 가면 나찌즘, 파시즘, 극좌로가면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다.


좋은 공동체의는 어떻게 이세상에 나타나는가?

그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의로 나타난다.


그 개인들이 모이면 어떤 사람들이 되는가?

바로 근대적 개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사적 소유권을 갖고 그것으로 생산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출발이 된다.

그래서 근대적 개인의 가장 중요한 권리는 소유권이다.

만약 소유권이 없다면 개인은 집단에 예속되고 집단에 예속되면 그는 집단의 부속 또는 노예로만 남는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를 택하고 자유 시장경제를 택한 나라들은 잘 살고 하나의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로 커나간 반면 공산주의를 택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나라는 못 살고 개인은 노예화가 되었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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