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소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없었다. 웃어 준 사람도 없었다. 안아 준 사람도 없었다. 들리는 건 소리치는 소리, 느껴지는 건 느닷없이 아픈 매, 보이는 건 차갑거나 화가 난 얼굴뿐이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소녀는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는 법을 배웠다. 마음을 닫는 것은 한번 배우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현실 세계에 마음을 닫은 대신 소녀가 발견한 건 '이야기'였다. 책을 처음 읽던 날이 생각난다. 그림책 속에는 언제나 웃는 짓는 엄마, 잘못해도 용서해주고 화내지 않는 아빠, 다정한 오빠와 친구들이 있었다. 아무려나. 동물들조차 책 속에서는 소녀에게 웃어 주었다.
이곳에 완벽한 세계가 있었다. 책표지를 넘기고 그안의 쓰여져있는 문장들을 하나씩 읽다보면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눈을 들면 이 낯선 곳이 어딘가 싶어 머리가 먹먹해졌다.
소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읽었다. 도서관에 처음 간 날은 높은 책장 가득찬 책들을 보고 너무 행복해 마음이 터질 뻔 했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바랄 수 있는 모든 행복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외에 더 큰 것은 바라면 다 빼앗길 것 같았다.
쉿, 조용히. 들키면 안돼. 이것으로 만족해.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소녀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이 너무 무서워 불을 끄고 잘 수도 없었다. 그날밤도 소녀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안데르센 동화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잠들면 꾸게 될 악몽이 무서워 눈이 절로 감겨질 때까지 기를 쓰고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잠든 작은 이마는 읽다만 '인어공주' 속 페이지에 푹 파묻혔다.
그리고 그날밤 소녀는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대신 꿈속에서는 잠들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읽었던 인어공주의 책 페이지가 펼쳐졌다.
인어공주가 꿈속 책의 페이지를 열고 뛰어나와 소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뒤를 왕자, 엄지공주, 성냥팔이 소녀, 야무진 양철병정과 발레리나 아가씨, 꿈의 신까지 모두 나와 소녀와 함께 인형들의 결혼식장에 초대받았다.
모두 다 안데르센 동화집에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꿈의 신이 내게도 찾아온 것일까? 소녀는 깨고 나서 너무 신기하고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들기 전에 마지막에 읽은 이야기가 꿈속에 찾아오는 듯 했다.
다음날 소녀는 자기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어보기로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페이지에 나온 동화 속 주인공이 그녀의 꿈속에 나왔다. 이번에는 보석이 박힌 목마을 타고 하늘을 나는 왕자가 나왔다.
세번째 밤에도 소녀는 책을 읽고 자려 했지만 엄마가 맨날 책에 코를 박고 자는 게 보기 싫다며 "이제 그만 자!" 하면서 억지로 책을 빼앗아버렸다. 소녀는 싫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얌전히 엄마말에 따랐다. 하지만 눈을 감자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이야기를 읽다가 잠자지 못 하는데 어떡하지? 또 악몽을 꾸면 어떡하지? 이때 좋은 생각이 났다. 이야기를 읽지 못 하면 다시 기억해보면 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어 책을 읽는다면? 안 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녀는 여태까지 읽었던 이야기 중에서 제일 행복한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그래야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집없는 천사>였다. 거기 나온 엄마가 정말 상냥해서 좋았고 나중에 결국엔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좋았다.
막상 떠올리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자세히 한문장 한문장 기억나지가 않았다. 결국엔 기억나는대로 '집없는 천사'와 비슷하지만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밤 꿈속에서는 바로 그 이야기가 나왔다.
신기하게도 소녀가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까지 모두 아름답고 완벽하게 펼쳐졌다. 깨고 났을 때 너무 행복해서 울고 있을 정도였다.
다만 꿈속에서 본 그 이야기는 정말 완벽했는데 다시 생각해내려고 하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의 신이 마법을 부려 이야기에 신비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그뒤로 소녀는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밤이면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고, 만들다 잠이 든 미완의 이야기는 꿈의 힘으로 아름다운 끝을 가지게 되었다. 깨고 나면 역시 다 잊어버렸지만.
나는 이야기 나라의 이야기 성안에서 혼자 사는 공주님이야. 소녀는 그뒤로도 계속 이야기를 읽고 만들면서 살았다. 이야기 외에 의미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뒤에 소녀는 깨어있을 때도 이야기로 꿈을 꾸고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녀가 꿈꾸고 만든 이야기들은 점점 쌓이고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들은 언제부턴가 자꾸 소녀를 이야기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만들면 만들수록 이야기 밖의 세상 속으로 나가라고 말을 했다.
그 속삭임을 더는 무시할 수 없게된 소녀는 언제부턴가 조용한 밤이면 이야기의 힘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올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왜냐면 소녀가 아는 것은 이야기뿐이 없으니까.
그러던 어느날밤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그 '누군가'를 향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소녀는 충격에 휩싸였다. 소녀는 '이야기'가 책 속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로 직접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너무도 오래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이야기를 만들면서 소녀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나본 적 없는 상냥하고 따뜻한 그 누군가에게.
소녀가 이야기 성을 나와 누군가에게 말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 날이 올지 안 올지는 잘 모른다. 온다해도 그것은 아마도 먼훗날.
내 이야기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어할까? 어떤 자신도 없었다. 내 이야기가,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어떤 자신도 없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에 그 사람 만큼의 소중함이 있는 거라면 나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내가 살아온 나만의 이야기를. 그건 오직 하나뿐이고 내게 만큼은 의미가 있을 테니. 어쩌면, 혹시, 아마도, 당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