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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립영화 : 전통매듭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

이해할 수 있는 미장센을 만들어 보아요

 내가 하고 있는 전통바느질은 [규방공예]에 포함된다. 낯선 용어인 규방공예란, 옛 사대부가 안방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활동을 말한다. 요리, 후원 가꾸기 등 넓은 범위까지 포함되지만, 좁게 분류하면 전통자수, 전통매듭, 침선, 천연염색 등을 이른다. 궁중에서는 바느질 하는 '침방'과 자수를 놓는 '수방', 매듭을 지었다는 '고얏방' 등 각각의 업무가 분류되어 조직화 되어 있었다. 이는 곧 각각의 분야가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직접 작업을 해보면 무엇하나 덜어낼 수 없이 서로 깊게 관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모두 알고 있어야 온전한 내 작품을 만들 수 있어서 수련기간이 길다. 영역도 넓지만 각각의 깊이 역시 개인차가 크다. 선택과 집중을 잘해서 자신만의 맥락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전부 다 잘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커피로 비유하자면, 일단 전통자수와 침선분야는 ‘신의 커피’라고 일컫는 파나마게이샤 커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커피 한 잔에 10만 원쯤 하는 고급 커피이고 우수한 바리스타들이 대회용으로 사용하는 원두이다. 내게 전통자수와 침선분야는 고급 전통공예 영역이고 작품을 위해서 어떠한 재료도 아낌없이 사용한다. 어차피 한 작품만 남길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작품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그것 하나만 기억하고 행동한다. 상품으로서의 바느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바느질로 대한다.


 그에 비해 전통매듭은 내게 ‘빽다방 커피’이다. 어디에나 있고 언제든 접근가능한 쉬운 전통공예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빽다방 커피숍 매니저의 마음으로 쉽게 다가가는 전통공예로 생각하기로 했다. 기계로 만든 실을 마다하지 않고 가격경쟁력도 떠올리는 상품으로 전통공예품으로 대한다. 실을 직접 짜거나 염색하는 일은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매듭짓는 일만 한다.

 전통매듭실을 짜는 ‘다회치기’는 언제나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끈도 아름답게 나온다. 내가 직접 하면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까지 끈 한 올 한 올에 배인다. 그래서 전통매듭과 관련한 수업문의가 오면 즐겁게 출강할 수 있다. 내겐 가벼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자수와 관련한 수업문의가 오면 시작부터 까다롭다. 그들은 취미로 시작하는 영역이지만 나는 ‘나의 삶’을 나누는 주제이기 때문에 쉽게 시작하지 않는다.    


 규방공예의 선택과 집중에 대한 작은 결론을 가지고 일을 대해야 의뢰받는 작품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짙은 책임감으로 내가 온전히 맡아야 할 일인가 아니면 다른 공방으로 바로 넘겨줘야 할 일인가 판단할 수 있다. 작업 의뢰가 왔을 때마다 미리 다짐한 작은 결론들은 사안마다 쉽게 결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독립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독립영화 소품팀에서 연락이 왔다. 아니, 직접 연락하기 전에 이미 자신들이 필요한 소품들을 우리 쇼핑몰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듣자마자 아득하다. 쇼핑몰은 전형적으로 취미로 즐길 수 있을만한 재료들이 올라가 있는데 독립영화 소품팀은 도대체 뭘 샀다는 것인가.

 “어… 어떤 장면에 필요한 소품인가요?”

 담당자 말로는 주인공이 전통매듭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고 한다. 어랏! 캐릭터가 전통매듭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질문이 많아진다. 아무리 내가 빽다방 매니저와 같은 마음으로 전통매듭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영상으로 남는 전통공예라면 이건 사안이 다르다. 독립영화가 말 그대로 비주류 매체이지만 어쨌든 기록으로 남는 영상에 말도 안 되는 전통소품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우리 공방이 손해를 보더라도 정확한 소품을 보내주고 촬영하는 게 맞는 일이다. 자세를 똑바로 하고 질문을 시작한다.

 “주인공의 직업이 매듭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단순한 취미로 하는 사람인가요?”

 “그게 큰 차이가 있나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직업으로 매듭 하는 사람이라면 방에 다회틀도 몇 개 더 들어가야 하고 술판도 보여야 하고 염색실이 감겨있는 얼레들도 있어야 해요. 매듭 할 때 최소한의 도구들이 그래요”

 “저희는 쇼핑몰에서 매듭끈이랑 송곳만 샀는데요.”

 “주인공이 취미로 매듭을 하는 캐릭터라면 괜찮아요. 하지만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 끈들도 사용하시면 안돼요.”

 “어;; 매듭끈이 왜요?”

 “아주 많이 달라요. 심지어 저희 끈들은 폴리가 섞여 있는 기계끈이라서 직업으로 매듭을 하는 사람 방에 있을만한 물건이 아니에요.”

 “선생님, 잠시만요, 확인하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소품팀은 그저 화면에 비치는 매듭끈 양이 작아서 더 많은 양을 도매값으로 살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연락했는데, 파는 사람이 저렇게 나오니 당황했다. <전통매듭재료에 관한 기초강의>를 전화로 듣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전화통화에서는 나는 쇼핑몰 사장님이 아니고, 규방공예 선생님이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돼서 지금은 쇼핑몰은 문을 닫고 있다. 전화올 때마다 자꾸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루에 수업을 16시간씩 하는 느낌이다)

 다행히 직업으로 전통매듭을 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나 보다. 그저 매듭끈 양이 더 많으면 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마음 한편의 의심은 여적 남아 있어서 오지랖 섞인 당부를 해둔다.

 “혹시나 추가촬영하실 때 매듭 관련한 도구들이 더 필요하시다면 연락 주세요. 매듭도구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고가이고 실제로 구입하기가 어려워요. 저희가 촬영 기간에 빌려드릴 수 있으니 촬영에 필요하다면 꼭 연락 주세요.”  

 담당자는 감사하다며 통화를 마쳤다. 통화한 사실도 잊을만한 시간이 지난 후에 영화 스틸컷 이미지가 왔다. 예술영화답게 이미지만 봐도 이미 있어 보인다. 화면 속에 배치된 매듭끈과 송곳만 봐도 캐릭터가 무슨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영상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알려주는구나 감탄했다. 한 땀 한 땀으로 보이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질감의 세상이었다. 우리의 작업이 너무 미시적인 게 아닌가, 너무 우리만의 언어로만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편의 언어와 세계관에 접목하는 전통공예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사진들이었다. 잠시 어려운 주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금방 빠져나왔다. 아직 그런 질문과 답을 갖기에는 경력과 내공이 짧다는 자기 객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방송국 사람들은 전통공예하는 사람들을 “천연염색한 생활한복을 입은 막걸리 좋아하는 아저씨들”로 이미지를 구축해 버린다. 막걸리를 사발로 먹어대고 걸걸한 사람들이 죄다 도자기 가마터에만 있다. 실제로 전통공예하는 여자들은 제대로 이미지화되지 못했다. 우리는 한복깃만 봐도 자신 있게 바느질하는 사람인지 아직 자기화가 덜된 바느질을 하는지 알 수 있고, 매듭의 밀도만 봐도 야무진 손인지 눈이 덜 트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더 디테일하게 생각해 본다면, '전통자수'하는 사람의 특징과 '누비 바느질'을 하는 사람은 매우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고, '전통매듭'을 하는 사람과 '자수놓는' 사람 역시 꽤나 다른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을 캐릭터화시켜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일 텐데 아직은 관심 두는 이들이 없다.


 시나리오 작가들이나 드라마 작가들의 세상에서 전통매듭은 그들의 관심밖인지 영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지만 본래 비주류인 전통자수보다도 훨씬 덜 다뤄진다. 전통매듭이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캐릭터는 아직 못 만난 것 같다. 바람으로는 그저 배경이미지로 사용되는 매듭끈과 송곳이 아니라, 매듭끈을 짜는 손모양만 보더라도 무슨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지, 꽉 쥐는 송곳과 부드럽게 잡는 송곳을 보고 캐릭터에 대해 단번에 설명해 주는 그런 장면들을 영상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독립영화 한편에 등장한 한 더미의 매듭끈과 빈티지 소품처럼 보이는 송곳을 보고 나는 자꾸 바라는 게 많아진다.


 언젠가 전통매듭을 직업으로 하는 멋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면 어떨까. 그에 맞는 라이벌로 수놓는 캐릭터도 멋있겠다. 침방과 수방 고얏방으로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상의원이 배경이라면 일반 시청자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매회 아름다운 궁중자수와 궁중매듭, 실제로 한 땀 한 땀 완성되는 한복들이 CF처럼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걸걸한 도자기 아저씨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장면으로 전통문화가 기억될 것이다.

 나는 그런 날을 위해 합당한 소품들을 준비해 놓아야지. 궁중자수소품들과 궁중노리개들을 더 많이 만들어둬야겠다. 진주두루주머니를 보관했던 - 상자마저도 정말 아름다운 - 소품들도 고증에 맞게 준비해 두고 공주들에게 드리웠던 수노리개와 상궁들이 착용한 비취발향노리개들까지 제대로 준비하려면 꽤나 바쁘게 작업해야 한다. 예쁜 작업할 생각에 마음은 설레고 그 작업할 시간을 짜내는 현실적 공방주인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정말이지, 선택과 집중을 잘하려고 애썼는데…… 아~ 이렇게 전통매듭도 백다방에서 파나마게이샤커피가 되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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