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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연기를 위한 바느질 프로그램

내가 만난 어느 배우님 찬가(讚歌)

조선빈티지 전통자수 기법 교재 - 사극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열심히 바느질하고 매듭짓다 보니 방송관련한 바느질과 매듭 촬영 때문에 찾는 사람은 자꾸 많아진다. 문제는, 우리 손과 주인공 손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20대 중반~30대 초반인데 우리 모두 마흔 줄이니 눈감고 아웅도 못할 일이다. 심지어 카메라는 날로 예민해지고 섬세하게 픽셀단위로 우리 손주름을 찍어댄다. 방송 관련한 연락이 올 때마다 주인공의 나이부터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니,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하다 싶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사극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1초 장면이든, 스쳐가는 장면이든 바느질 장면도 계속될 것이다. 요즘은 전통매듭 촬영을 요구하는 경우도 간간히 생기니 [사극 연기를 위한 기초 바느질과 전통매듭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연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자신의 배역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묻어나도록 준비하는 게 연기자의 몫이 아닐까. 나는 배우들의 바느질이 그저 연기가 아니었으면 싶다. 풀샷이든 클로우즈샷이든 자신의 손도 자연스럽게 장면에 묻어 나오길 바란다.


 [마치 초등학교 때 배운 피아노처럼]

 30년 전의 멜로디라도 그때 기억한 곡들은 마흔 줄에도 손의 기억으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사극 연기를 위한 바느질도, 매듭도 미리 경험하고 준비하면, 굳이 대역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 장면을 책임질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촬영을 경험하고 더 늦기 전에 [사극연기를 위한 기초바느질과 전통매듭 프로그램]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다짐에는 L배우님의 준비성이 큰 몫을 했다.


 어느 날, L배우님이 우리 작업실에서 전통자수 수업을 듣겠다는 연락받았다. 주연배우가 직접 전통자수를 배우겠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처음이었고, 대기하는 시간에 잠깐 익히는 정도가 아니라 별도로 시간을 내서 자수 수업을 듣겠다니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연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저 정도 준비성이 있어야 주연을 맡을 수 있는 거구나.’

 서울작업실에서 수업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나는 야외 촬영장에서 L 배우를 만났는데, 자신과 같은 한복을 입고 있는 우리를 보고 L 배우는 바로 인사를 건넨다. 전통자수 수업은 파랑언니가 진행했으니 L배우와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이다. 어색한 눈길이지만 따뜻한 인사였다. 이 더운 날, 바람 한 점 안 통할 것 같은, 저 한복을 입고 연기도 하고 주변 사람도 챙기다니 절로 눈길이 간다.


 나는 예정에 없이 갑자기 촬영장에 와서 옷차림이고 메이크업이고 뭐고 하나도 준비 없이, 실로실로 언니를 따라 촬영장에 놀러 온 동네 아줌마 같은 이미지로 배우를 만난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최소한의 겉치레는 좀 챙겼어야 했건만! L배우님 만날 생각보다는 우리 작업실이 담당한 전통자수 소품 문제 때문에 촬영장에 간 거라서 내 겉치레는 생각도 못했다. 언제든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날 수 있는 자리니 신경은 썼어야 했는데 무심했다.


 L배우의 따뜻한 인사와 별개로 나는 그 촬영장에서 마음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촬영장에서는 아무도 바느질 장면에 신경 쓰지 않았고 처음부터 염려했던 자수소품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 의사표현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나의 염려는 그들에게 귀찮은 일처럼 보여서 굉장히 언짢았다. 삼 십 명 가까운 스태프들이 둘러싼 이 한옥에서 바느질 장면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나, 실로실로언니, 그리고 L 배우뿐이었다.


 L 배우는 촬영 전에 바늘 움직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자신이 바느질을 정확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 속도는 맞는지, 이 정도면 괜찮은지 여러 번 확인하고 촬영했다. 주연급 배우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천천히 바느질하는 장면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바느질 장면도 필요해서 실로실로 언니가 같이 촬영을 했다. L 배우는 실로실로 언니와 가까이 있었고, 나는 모니터로 장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수틀 상태가 평소 우리가 수놓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서 손대역하는 실로실로 언니가 꽤나 고생을 했다.

 저 수틀이나 촬영에 쓰일 자수원단까지 계약서에 넣었어야 했는데 나의 의심이 느슨했다. 방송 3사의 자수 수틀은 정말로 문제가 있다. 실제로 전통자수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틀과 수틀다리가 계속 소품팀에 있으니 사극에 나오는 자수장면은 언제나 문젯거리를 담고 있다. 괜찮은 척 애쓰며 실로실로 언니가 조심스럽게 촬영을 마쳤다. L배우님은 쉴 틈도 없이 계속 촬영 중이다.   

 

 되돌아 생각해 보니, L배우님과 가까이 안 있었던 일은 조상이 도왔구나 싶다. L배우님 자수 수업이 끝나고, 서울작업실 선생님들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너무 쑥스러워서 사진 찍자고 말을 못 했다고 전해 들었다. 아니 그 소중한 기회에 사진 한 장을 안 찍었냐고, 그래도 한 장은 같이 찍어두지 그랬냐며 몹시 다그쳤던 나를 아주 많이 반성한다.

 (서울작업실 선생님 이야기로는) 가까이에서 사진 찍었다가는 밖에 내놓지도 못하고 인생 최대 굴욕샷으로 남을 것 같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아휴, 절로 이해가 됐다…… 나도 같이 찍자고 말이 안 나오더라. 곁에 있으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하긴 드라마 전체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주연배우 아닌가. 입체감 있는 얼굴 하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까지 공주님이 따로 없던데 다른 사람들은 용감무쌍하기도 하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카메라를 내밀다니, 다들 자존감이 높은 모양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촬영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지만 L배우님과 사진 한 컷 못 남기고 드라마 촬영을 마쳤다. 후회해야 할 일인 것 같지만 묘하게 잘한 것 같은 느낌. 우리 모두 어쨌든 인생 최대의 굴욕사진은 안 남겼다는 사실에 큰 의의를 둬야 할 것 같다. L배우님은 앞으로도 사극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 만나게 되면 조금은 곱게 다듬고 만나야겠다, 그때 너무 없어 보였다. 정말.  


전통자수도, 매듭도 이렇게 정리해 두면 사극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아직 프로그램을 공지하기도 전.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전통매듭 손대역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20대 초반 J 배우님. 촬영장에 보낼 수 있는 우리 선생님들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이미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시청자들이 예쁜 배우님 얼굴을 보다가 손으로 장면이 넘어오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무슨 고생을 이렇게 했나 염려할 지경이다. 갖고 있는 여러 손사진들을 살펴봐도 안될 일이다.


 PD님께 어떤 매듭을 촬영하는지 물으니 생각보다 간단한 전통매듭이었다. 그 매듭이라면 굳이 대역을 쓰지 않고 배우가 30분 정도만 배우면 촬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촬영장에는 다른 장면 때문에 매듭 선생님이 가있는 상황이라서 굳이 나까지 촬영장에 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배우가 직접 찍은 장면이니 편집이나 화면구도에서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이번 드라마는 이렇게 또 한 고비 넘어간다.


 그러나 앞으로 연락올 다른 드라마를 위해서라도 얼른 준비를 해야겠다. 빨리 [사극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기획사든 방송국이든 보내야겠다. 우리도 헐레벌떡 사람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배우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기본적인 자수 바느질이나 기초매듭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 배우에게도 작은 메리트가 되지 않을까.


 오늘 저녁나절, 분주하게 오고 갔던 카톡의 급한 불 하나는 끄고  가만히 앉아서 프로그램 콘텐츠를 생각해 본다. 전통자수 기법은 몇 개나 넣으면 될지, 전통매듭은 어떤 매듭을 담을지, 한복저고리의 기초 침선은 알려주는 게 나을까, 다 너무 어려울까……  잠시 고민해 보다가 곧 떠오르는 합리적 생각들.

 ‘어여쁜 배우님들 옆에서 수업한다는 게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 일이 될 터인데 너 괜찮으냐, 내, 다음 생애에는 곱게 태어나도록 하자. 이런 향단이의 마음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네! 바느질 프로그램 정하기 전에 다이어트 프로그램부터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게 너의 사극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맑게 울리는 양심에 뼈 때리는 소리들.

 오래간만에 저녁을 굶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효과가 있다.




(L배우님... 언젠가 실명으로 감사인사를 남길 날도 오겠지요? 대작 주연배우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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