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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Dec 06. 2023

서울의 봄

한국에 NL과 군자산의 약속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나오는 날이 올까?



<서울의 봄>은 관객을 어떻게든 캐릭터와 밀착시키고 상황에 밀어넣어 강한 감정적/정서적인 반응을 유발하려는 한국 영화 특유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이기보다 단순하고 평면적인 캐릭터들을 내세우는 것부터 인물을 '익스트림'하게 클로즈업해 스크린에 가득 채워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자극적인 텍스쳐까지, <서울의 봄>은 이 한국 영화 특유의 인장을 영화 내내 숨김없이 찍어놨습니다.


최근 대부분 한국 영화가 이 감정적/정서적 자극만 남은 껍데기들이었다면 <서울의 봄>이 이들과 다른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이어가는 높은 연출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객들이 심장박동수나 스트레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이유의 뿌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높은 자극 + 높은 연출력. 이것은 '12.12'라는 굵고 강렬한 역사적 서사의 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실제 사건 기반의 망작들이 숱하게 있었으니까요. 김성수 감독의 연출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높은 수준의 긴장감이 밀도 있게 끝까지 진행된 한국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영화 내적으로 <서울의 봄>은 제가 싫어하는 한국 영화 특유의 자극적인 텍스쳐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시나리오, 연출, 편집, 음향, 연기 등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영화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으면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영화 외적인 면을 잠깐 봅시다. <남산의 부장들>, <보통사람>, <남영동 1985>, <26년>, <택시 운전사>, <변호인>, <화려한 휴가>, <공작>, <1987>, <헌트>, <더 킹> 등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의 대부분 소재와 주제는 한결같습니다. 왼쪽에서 바라보는 그 시대는 언제나 악마 같은 군/경찰/정부(안기부), 그들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대학생들, 민주주의를 빼앗기고 억압받는 시민들로만 그려지는 일종의 왜곡된 캐리커쳐. 저렇게 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뿐 아니라 얼마 전 있었던 드라마 <무빙>처럼 소재가 무엇이든 배경이 1980년대라면 위의 이야기들은 빠지지 않습니다. 억압 받는 시민과 억압하는 악마. 세계를 억압과 피억압으로 보는 이데올로기, 지극히 마르크스적인 이분법적 세계관입니다.


극히 제한적인 소재와 주제, 오직 하나뿐인 시선, 다분히 의도를 가진 시나리오와 연출. 조금은 차분히 거리를 두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과 사건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할 여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리? 해석? 생각? 이런 영화들이 애초에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사와 악마, 선과 악의 서사, 그 간명하고 선명한 세계관.




어릴 적에는 감독이나 작가가 숨겨놓은 의도와 시선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의 표면 만을 봤을 뿐이었죠. 하지만 점점 영화 관람 리스트가 길어지고 한국 정치와 사회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어느 시점부터 영화 속에 직간접적으로 녹아있는 감독의 의도와 시선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극 속 인물이 하는 말이 단순히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갖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닌 감독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던거죠. 그때부터였습니다. 한국 영화가 정치와 사회에 있어서 너무도 일방적으로 하나의 시선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말이죠.


군부 독재가 정의롭지 않고 선하지 않고 절차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입니다. 그것에 대해 따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들에 대항했던 학생운동은 어떤가요? 그들의 모든 결정과 행동이 민주적이었고 절차적 정당성을 지녔으며 정의롭기만 했을까요? 그들은 군부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많은 폭력을 조직의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저질렀습니다. 자신들이 대항하던 군부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간첩"으로 의심된다며 길거리에서 무고한 시민을 잡아 고문하다가 살해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학생운동을 지휘했던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북한과 내통하고 접선하고 지령을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시민으로부터 환영받고 보호받던 학생운동이 시민에게서 외면 받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꽤 오래전 언젠가 진중권이 했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민노당에 있을 때 언젠가부터 새로운 사람들이 입당하더니 회의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김정일 장군님이 좋아하시겠냐"는 식의 말들이 빈번해졌다고 하죠. "미제의 검은 물"이라며 콜라도 잘 못 마시게 했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은 80~90년대 학생운동이 오직 민주주의 쟁취만을 위한 정의롭고 순수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2개의 파벌 중 하나가 바로 민족해방파(NL, National Liberation)이죠. 민족해방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 언어인 '민족해방'에서 따왔습니다. 이들이 바로 진중권이 이야기했던 "당신이 북한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김정일 장군님이 좋아하시겠나"고 따지던 그 장본인들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남한의 근본적인 문제는 미제(미국 제국주의, 북한이 미제 승냥이라고 할 때의 그 미제)에 의해 종속당하고 지배당하는 민족모순입니다. 그들에게 북한은 마르크스사상에 의한 혁명이 완수되고 제국주의의 압제에 있지 않은 정의로운 국가입니다. 그런 그들의 근본 행동강령은 미제(국)에 맞서고 "우리 민족끼리" 북한과 협력해 통일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분들은 아마 '강철서신'의 김영환이 누구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는 '강철서신'이라는 글을 통해 80년대 운동권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전한 운동권의 수뇌부이자 일종의 '사상가'였으며 NL파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그는 반제(국)청년동맹을 결성하고 남파간첩을 만나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북한에 밀입북해 평양에서 김일성을 직접 만나기도 한 인물입니다(그 이후 안기부에 붙잡히고 전향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한 학생운동, 그리고 그 학생운동의 큰 두 개의 축 중 하나인 NL. 나머지 하나는 PD입니다( 물론 더 세부적으로 가면 여기서 더 갈라지기도 하지만 ). PD파의 목표가 노조를 결성하고 자본가에 맞서며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면, NL파는 민족운동, 즉 미제승냥이를 축출하고 북한과 협력해 통일을 이루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PD파보다 더 강하게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종북, 즉 북한을 따르는 성향이 강해 북한의 대남공작과 자주 연계되기도 했습니다.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남한 정부, 즉 신군부(전두환, 노태우)는 NL의 목표를 가로막는 악마였습니다. 북한은 남파 간첩 뿐 아니라 남한의 대학생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죠. NL파에게 학생운동의 최종목적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아닌 북한의 지시에 의한 민족통일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항일운동가들의 최종목표가 조선 해방이 아닌 조선의 공산주의 혁명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여전히 대학생들, 시민단체들이 종종 미국대사관에 담을 넘어 들어가려 하고 시위현장에서 "미제 물러가라"를 외치는 이유, 그 뿌리는 모두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어쨌든 일반 시민들 및 다른 학생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지하에서만 숨어있던 NL은 2001년 수뇌부들이 한 자리에 일종의 대회를 엽니다. 앞으로 NL은 지하활동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와 정당과 각종 시민단체 및 노조를 장악해서 활동한다는 행동강령을 선언하기 위해서였죠. 그것이 그 유명한(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 '군자산의 약속'입니다. 이후 그들은 민노당을 접수하고 여러 시민단체와 노조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2013년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사건으로 그 실체가 많은 이들에게 드러나고 본체였던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게 되죠. 


참고로, NL이 정당과 수많은 시민단체와 노조들을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빠르게 장악했던 수법은 이후 '신천지'로 그대로 전해져 적은 수의 '신천지' 신자들이 많은 교회를 빠르게 접수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정의나 합법, 절차와 거리가 멉니다. 조직 접수를 위해 치밀하게 우두머리를 상대로 '공작'을 벌이고 조직 내 민주적인 선거를 방해하거나 조작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죠. NL의 공작/행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조직/사람들보다 놀라울 정도로 비열하고 뻔뻔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남다른 '목표 의식' 때문입니다. 그 목표가 아무리 크건 작건, 그 행동이 아무리 파렴치하건, 그 행동으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가 아무리 크건 작건, 그 모든 것들은 '혁명'이라는 대의를 완수하기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습니다.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희생"은 레닌 혁명주의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소련이 아무리 많은 국민을 희생시켜도 지도층이 놀라울 정도로 뻔뻔할 수 이유, 그 모든 비극은 더 큰 대의로 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다. 저는 이것이 지금 우리가 과거와 비교해 점점 잘못에 뻔뻔해지고 거짓말이 일상해되어는 사회가 되어가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너무 글이 길어졌네요. 결론은 군부 독재에 맞서 정의롭게만 보이는 학생운동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매우 짙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쟁취를 표면에 내세웠던 그들은 사실 다른 목적이 있었고 그 방식은 극히 비민주적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한다던 그들은 철저히 엘리트주의였으며 언제나 비밀스럽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던 수뇌부는 그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군부와 똑같은 폐쇄적인 독재 체제였습니다. 전국의 수 만명이 모인 학생대회에서 가마를 타고 나타나는 한총련 회장은 마치 컬트 교주와 같은 지위를 누렸죠. 그리고 그 수뇌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비판하며 돌려서 군부 독재를 변호하거나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행동 교리 중 하나로 삼으며 미국을 내쫓고 북한의 지령을 받으면서 통일을 이루려 한 단체를 과연 대한민국 정부가 어떤 식으로 대했어야 했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경제/군사적으로 압도하는 지금이 아닌 도발이 빈번하고 경제력이 비등하 엄혹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에서 안기부와 남영동 대공분실이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간첩을 잡아들이던 안기부는 학생운동가들에게 일종의 공포의 대상이자 악의 근원였던 것이죠.




저는 지금까지 학생운동의 어두운 면을 다룬 그 어떤 영화/드라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지난 여러 브런치 글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 이런 한국 영화계가 정상일까요? 전두환을 일방적으로 악마화하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저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다분히 의도적이며 영화 미학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보지만). 다만 제가 원하는 것은 '시선의 다양성'입니다. 어느 한쪽의 그림자와 다른 한쪽의 빛만을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사회, 그런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는 아닐 것입니다. 전체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무엇입니까. 다양성입니다. 한국의 사회/문화는 적어도 '컨텐츠의 생산 측면'에서는 다양성이 파괴된 철저히 비민주주의적인 생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보가 좋아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제가 많은 한국 영화를 예술이나 문화상품이 아닌 하나의 '선동'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학생운동의 그림자를 주제/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사람들이 <서울의 봄>을 관람하며 분노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로 숨겨져있던 학생운동의 어두운 모습들을 다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과 분노를 느낄 때, 그때가 비로소 한국 사회가 일방적인 한 쪽만의 모습이 아닌 다양성과 균형감이 잡힌 '진짜' 1980년대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는 때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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