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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May 02. 2021

극한 소심

자칭 쫌생이랑 살기

 "대은아~~ 이리 좀 와봐라" 어제 저녁 남편이 날 불렀다.


 남편은 자기 공부방을 갖고 있지만 내 책상은 거실에 있다. 남편 은퇴 후 우린 서로 떨어져 각기 제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 와보라고 소리를 지른다. 자기 방에 와서 모니터를 보라는 것이다. 때론 예쁜 강아지나 고양이 '짤', 또 때론 일본어 공부하느라 보고 있는 영화의 웃기는 ('재밌게 웃기는'게 아니라 그야말로 '웃기는') 장면,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도시 구석구석을 걸어가며 찍은 동영상, 뭐 이런 걸 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고맙다. 공감 제로, 이심전심 지수 빵점 남편이 그나마 날 위한다고 하는 일이니 고마워 해야하는 건 알겠는데 이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물론 고양이도 예쁘고 내가 걸었던 뉴욕의 거리도 좋긴 하지만 나도 내가 보던 게 있고 하던 게 있는데 그때마다 방으로 가서 음~~ 좋군 해야하는 건 확실히 귀찮은 일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면 섭섭해하고 삐진다. 차라리 '좋군' 하고 빨리 빠져나가는 게 훨 간단하다. 


 그런데 종종 다른 어조로 부를 때가 있다. 어제처럼 약간 처량하지만 심각한 어투가 들어 있을 땐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소리다. 소리 안 나게 투덜투덜 하면서 건너 갔더니 새로 산 모니터를 이만큼 빼놓고 들여다 보다가 내게 종이를 내민다. 돋보기를 고쳐 쓰고 들여다 본 설명서엔 이런 장면이 있었다.



 남편이 쓰던 모니터가 고장 나서 집 앞 서비스센터까지 모니터를 모시고 (진짜 모시고) 갔는데 고치는 비용보다 새로 사는 비용이 더 싸다는 말 같지 않은 결론을 들었다. 그 뒤 열흘 넘게 검색에, 유튜브에, 처남네 가족들 실제 사용 후기에다가 상품 카타로그까지 섭렵하며 끙끙거리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얼른 안 사?" 하는 마누라 고함 소리에 겨우 장만한 모니터다. 상품 설명서에 틀림없이 이렇게 기울기 조정이 된다고 나와 있는데 이게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왜 안 되겠는가! 그런데 남편에겐 이렇게 안 되는 게 정말 많다. 


 언젠가는 남편이 컴퓨터 무슨 부품을 산다고 몇 날 며칠 고민을 하는 세월을 보내던 중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 뿔이 잔뜩 난 내가 입을 닫았는데 하필 그 날 공들여 골라 주문한 부품이 도착한 것이다. 기분 좋게 방으로 갖고 들어간 것까진 봤는데 그 후 한참 동안 방안에서 꿍얼꿍얼 부시럭 궁시렁~~~ 이런 소음만 들리고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냉냉한 얼굴로 저녁을 차려 먹고 치우고 이 방으로 저 방으로 따로 시간을 보내며 밤이 깊었는데 남편이 다가 왔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다신 마음 안 상하게 하겠다고. 


 어? 이거 너무 빠르잖아? 이 삐돌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말 그대로 개과천선을 했나? 뭔가 찜찜했지만 하도 잘못했다고 비니 그래 오늘도 져 주마 하고 알겠다고, 됐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러자마자 몇 초의 여지도 없이 "이거 와서 좀 끼워줘" 그랬다. 


 헐~~~~ 

 새로 산 부품을 컴퓨터 안 슬롯에 끼워 넣어야 하는데 이게 들어가질 않았던 거다. 제대로 돌아가나 빨리 확인해보고 싶은데 부품을 끼울 순 없고 힘 줘서 끼우다 부러질 것 같고 이런 걸 잘 하는 마누라는 잔뜩 뿔이 났고. 어쩔 수 없이,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이 (당연 자기가 잘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우길 형편이 안 되니) 마누라에게 그만 사과를 한 것이었다. 


 극한 소심남 남편은 모든 걸 조심하라 한다. 길거리 갈 땐 건물에 너무 붙지 마라, 간판 떨어진다, 공사장 지날 땐 비계 떨어지나 잘 보고 다녀라, 횡단보도에서 저 멀리 차가 보여도 절대 건너면 안 된다, 차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칫솔 물고 다니지 마라, 넘어지면 뽈따구 빵구난다. 가습기 벽에 붙이지 마라 벽지에 습기찬다, 가스불 가까이 가지 마라, 머리카락에 불 붙는다 등등. 유리 액자 하나 분해하면서 보안경에 안전화까지 꺼내 신고서야 망치를 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렇게 조심 일색인 남편이 뭔가에 손을 대면 죄 고장이 난다. 창고 선반에 올리고 내렸을 뿐인데 정말 딱 그것만 했는데 부셔먹은 선풍기가 무려 세 대다. 청소기 돌려 주마 하고 요란 떨며 깨끗한 척 하다 두 번이나 대가리를 (이 부품 이름이 뭐지?)를 새로 사야 했다. 왜 장롱 위는 민다고 난린지. 

 남편 입장에선 조심하는데 자꾸 사고를 치게 되니 더 조심하는 좀생이가 되어 버렸고 내 입장에선 조심해야 할 일엔 덤벙대고 대범할 일엔 좀스러워지는 이해불가 남편이 되어버렸다. 


 어쨋든 모니터 뒷 쪽을 들여다 보니 이렇게 생겼다.


 "봐, 도저히 움직이게 생기지 않았잖아, 다 고정해놨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움직인다 했으면 움직이겠지.

난 '제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손으로 모니터 지지대를 마주 잡고 턱을 모니터 위에 대고 (부러진다, 부러진다니까 하는 외침이 들렸다) 슬쩍 뒤로 밀어봤다. 힘도 제대로 주기 전에 뒤로 슥 밀린다. 참 네~~~ "움직이잖아!" 하고 남편을 째려보니 몹시 당황한 얼굴로 어어어어~~ 하며 바보 소릴 내고 있다. 에휴~~~~ 정말 한숨 나온다. 저런 마음으로 사회생활 하며 꼬박꼬박 월급 갖다 줬으니 그 긴 세월, 속은 얼마나 부대꼈을 테며 주변에 얼마나 폐는 끼쳤겠는가! 서로 불쌍타!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 하고 꽥 소릴 냈더니 "내가 쫌생이 아이가"한다. 아이구, 항복은 또 어찌 저리 쉽게 하는지.  물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많이 약 오를게다. 덤벙이 조심성없는 마누라가 저런 일은 겁없이 밀거나 당기거나 해서 해결을 보니 그때마다 사정하고 구걸하는게 쉽기야 하겠나? 그래도 별 수 있겠어?. 그냥 납작 엎드릴 밖에.ㅎㅎㅎ


 부부싸움 끝에 해달랬던 컴퓨터 부품은? 한 방에 딱 소리나게 끼워줬다. 완전 속았구나, 역시 인간은 안 변하는 건데 왜 빨리 화해해줬을까 잠시 후회스러웠지만 입이 쩍 벌어져 좋아라 웃는 모습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러니 긴 세월 같이 살고 있는게지. 



 찾아 보니 망가진 청소기 사진이 남아 있었다. 바로 요것.

저걸 부러뜨려 놓고 어쩌나 내려다 보고 있길래 막 화를 냈더니 좀 있다 저 꼴을 만들어 눈 앞에 내놨다. 방향도 안 틀어지고 각도도 안 꺽기는데 어찌 쓰라는 건지. 바로 폐기처분, 남편은 덕분에 한동안 황금의 똥손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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