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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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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Dec 01. 2016

#01.미국병

불치병인지 확인해 보기로 하다.



American Dream




막연한 꿈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시는 두 분의 이모가 계신데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모네 가족들이 한국에 오실 때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기 때문에 미국에 사는 사촌들과는 어린 시절부터 몇 년에 한 번씩은 함께 지냈다. 친가 쪽 사촌을 통틀어서도 막내라 동생이 없던 나는 사촌동생들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반가웠다. 당시만 해도 이모들이 미국에서 한 보따리씩 들고 오신 각종 미제 장난감과 맛있는 과자들, 세련된 옷 등을 보면 신기했다. 이들이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공항에서 뒷모습에 열심히 손을 흔들며 나도 언젠가 저 안으로 들어가 미국에 가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린이들의 친구 찰리브라운과 스누피

부러움 혹은 동경

1981년생인 나는 어렸을 적 TV를 주를 이루던 미국 만화(스누피 등)들을 즐겨 시청하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부터 중학교 졸업시기 까지 꽤 많은 (부자) 친구들이 미국 또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모습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부러움과 함께 미국에 대한 동경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부모님에게 어떤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고 미국에 유학 보내줄 집안 형편이 안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간 혼자서 끙끙 앓다가 소심하게 미국에 가고 싶으니 이모네로 보내달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역시나 단칼에 거절당했고 그 후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어린이들의 영웅이였던 워리어와 헐크호건


미국 문화에 빠져들다.

스포츠와 음악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나는 미국을 더욱 동경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모여 헐크 호건, 워리어, 마초맨 등이 나오는 WWF비디오를 보며 하루 종일 레슬링을 했었고 중학교 때는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찰스 바클리 등에 열광하며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NBA 선수카드 수집하는데 쏟아부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 KBO뿐 아니라 MLB까지 섭렵했었다.

중딩시절 수집 열풍이였던 NBA 카드


TV를 켜고 2번 채널로 두두둑 돌리면 당시 유일했던 국외 방송 채널 AFKN(주한미군 국내 방송)에서 마이클 잭슨, MC해머, 크리스 크로스 등이 나왔는데 화면을 한참 동안 넋 놓고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CD플레이어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미국 힙합 CD를 사 가지고 온 친구들 옆에 기생해 쉬는 시간 동안 잠깐씩 음악을 듣기도 하였고(투팍, 싸이프레스 힐, 비기 등)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집에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전까지는 형의 영향으로 유재하, 이정석, 유열, 이문세 등의 노래를 들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쯤 데뷔한 이후 듀스, 룰라, 잼, 노이즈와 같은 팀들이 활동을 할 시기니 미국의 힙합 음악은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꼬마 힙합 듀오 '크리스크로스'


그렇게 지내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랩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신촌의 한 지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서 같이 무대 위에 올랐을 뿐인데 그곳은 마스터플랜이라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한 장소였고 그렇게 얼떨결에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나를 더욱 미국의 문화에 빠져들게 하였고 미국에서 살다온 뮤지션 동료들이 힙합 음악을 들으며 가사에 대한 해석을 해주고 미국 문화에 대해 설명해 줄 때면 신기해하며 마냥 부러워했던 것 같다.




정체기

몇 년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하며 자유를 누렸고 대학에 가서 각종 친목도모와 음주에 열중하다 군대를 가게 되었고 전역 후에는 회사를 다니며 먹고살기 바빴던 것 같다. 20대에도 방학이나 틈틈이 친구들은 미국이다 유럽이다 배낭여행도 가고 유학도 가고 했지만 완전히 남의 얘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내가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20대의 10년이 지났다.  




대반전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노예처럼 살았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음악 관련 회사에 다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K-POP의 열풍이 유럽, 미국 등에서도 시작될 시점이었고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한국음악산업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1회씩 보내주는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국내 유명 레이블들을 담당하며 유통 마케팅 업무를 하던 이력이 도움이 되어 매우 운이 좋게도 10여 명 안에 뽑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그 해에 연수지는 미국의 뉴욕이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평생 가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미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당시 나이 33살이었다.




New York Times Square

중독되다.

CMJ Music Marathon, Spotify, google, MTV, BMI 등을 견학하며 뉴욕에서의 1주일은 신기함으로 시작해 놀라움으로 끝날 정도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고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김에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눈이 돌아가고 LA에 가서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의지하다

한국에 돌아와 하던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꽤 오랜 시간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미국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 졌다. 우선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나를 재워줄 수 있는 곳을 체크하였고 사업자 대출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지만 돈을 조금 더 대출받아 짐가방을 싸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Los Angeles - San Francisco -  Berkeley - Austin - New York - Hawaii를 여행하였고 각 도시의 특색과 문화를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으며 내가 살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도 마음속에 점찍어 두고 언젠가는 그곳에 살아 보리라 다짐하였다.  한




google 본사 방문

확인하다

돌아온 몇 달 동안 한국에 적응할 만할 때쯤 감사하게도 미국으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고 실리콘밸리 지역으로 2주 정도 다시 떠나게 된다.  

google, linkedin, Uber 등 실리콘밸리의 많은 IT 회사 및 스타트업 시스템을 견학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조직문화 및 업무시스템을 직접 확인한 후에 할 말을 잃었고 언젠가는 이런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함만 더욱 커져갔다.






현실의 벽

하지만 역시 현실의 벽은 높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다시 일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병은 악화되어 갔다. 여행이야 또 갈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비자 문제와 미국 내에서의 경제활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미국행은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무뎌져 갔을 때쯤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뜻밖의 경험

중국에서 한국 콘텐츠의 열풍이 불었고 오랫동안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중국 내의 저작권 이슈가 해결될 조짐이 보이면서 뜻밖의 기회에 한국음악을 중국에 유통하고 마케팅하며 저작권을 징수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북경에서 살게 되었고 한국의 조직생활에 염증이 생긴 탓이었는지 해외에서의 근무를 결심하는데 의외로 큰 고민이 없었다. 중국은 생각보다 많이 발달되어 있었고 특히 북경은 서울보다 더 그렇다고 느낀 부분도 많다. 결과 적으로 몸담고 있던 회사의 조직문화는 한국의 어느 회사보다 좋지 않은 환경이었기에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사촌동생의 결혼식 참석차 LA에 일주일간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을 체감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모인 미국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 용기를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면적과 인구의 미국과 중국. 짧은 경험 후에 한국 콘텐츠시장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위기 뒤에 기회

프로야구에는 위기 뒤에 기회라는 말이 있다. 위험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 흐름을 타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존재했고 조금만 잘 적응했다면 중국의 음악산업 전문가가 되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한, 두 달 정도 고민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양한 업계 경력 덕에 같이 일하자는 한국 회사는 꽤 있었지만 살던 방, 차, 다양한 가구와 가전들을 정리하고 캐리어 3개만 들고 중국으로 넘어갔었던 터라 몸이 매우 가벼운 상태였기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정말 미국에 도전해 볼 기회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짧지만 미국과 중국 같이 넓은 나라에서의 경험은 더욱 강한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나를 더욱 자극했다.




불행 중 다행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36살이라는 나이는 매우 불리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 덕분에 아이도 없으며 마침 여자 친구도 없으니 이 얼마나 유리한 상황인가. 평소에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를 둔 친구들을 그렇게 부러워하며 외로웠는데 생각해 보니 아직 솔로인 덕에 내 한 몸만 생각하면 되는 심플한 상황인 것이다.


비자 문제는 어학원을 통한 F-1 비자로 해결하기로 했기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에 갈 때 잠시 가족들에게 맡겼던 애완견만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면 많은 상황이 정리된다.


혼자이기에 좋은점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시간

결국 그렇게 20여 년이 넘도록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꿈을 확인하러 가기로 다짐하였다. 중국에서의 경험처럼 금방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충동적으로 선택한 길이 틀림없다. 20년 넘게 억지로 자제시켜온 충동.




한국을 떠나고 싶은 병은 아닐까?

나는 확실히 한국의 몇 가지 부정적인 부분에 굉장한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불합리한 사회구조, 저주받은 세대의 현실, 경직된 조직문화, 자비 없는 기득권 세력들, 행복의 가치에 대한 기준 등 생각해 보면 꽤나 많은 것 같다. 주변에서는 외국은 안 그렇겠냐라고 하고 어디를 가던 다 비슷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어디를 가던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살기 좋은 점과 나쁜 점들이 공존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자꾸만 떠나고 싶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나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치열한 경쟁보다는 조금의 공존을 배웠으면 좋겠고 행복한 삶에 대한 가치를 돈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국에 살았던 그 잠깐의 시간동안에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형들 동생들이 모두 모여있는 한국이 매우 그리웠음에도 불구하고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어른들이 우리 세대에 물려준 미친듯한 경쟁과 척박한 삶의 질을 미래의 가족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국병은 완치될 것인가.

나는 불확실한 가능성이 좋다. 내 5년 후의 모습이나 10년 후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끔찍하게 재미없을 수도 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이 또다시 나를 매우 힘들게 할 수 있지만 두 번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니기에 내 선택을 믿고 후회 없이 도전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적어도 이번에는 환상이 깨져 현실에 보다 집중하던지 꿈을 이루던지 나의 미국병이 어떤 식으로든 결판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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