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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Nov 15. 2021

2800년 전 한국과 일본

기후 변화의 충격이 낳은 문명의 지각변동

[편집자 ]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막을 내렸다. 참가국들은 지구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제한다는 원칙재확인했지만 각국의 탄소감축 목표 설정내년으로 미뤘다. 지금 인류가 처한 기후 상황은 절박하다. 기후는 문명의 배경 같은 것이어서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문제가 닥쳤을 때는 피하기 어렵다. 첨단 과학 기술에 힘입어 우리는  충격의 실상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기후 위기는 근대 문명이 자초한 것이라는 사실이 다른 점이다. 국내 고기후학 전문가인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의 <기후의 >에는 과거 기후 충격이 인류와 한반도 문명에 미친 영향이 세히 소개된다. 그중 일부다.


대홍수 전설, 즉 신적인 계시를 받고 배를 건조해 신의 진노로 지상에 닥친 대홍수를 피한다는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오고 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나 그 이전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는 잘 알려진 일부 사례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 전설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과거 환경사를 검토해 대홍수의 실체가 될 만한 사건들을 찾아왔는데, 홀로세 초기 흑해에서 일어난 홍수도 그중 하나였다.


흑해는 최종빙기 내내 서쪽의 알프스 산지에서 보스포루스 해협(당시에는 하도)을 통해 들어오는 융빙수로 가득 찬 대형 호수였다. 그러나 홀로세의 개시와 함께 알프스의 빙하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주변 산지로부터 유입되던 융빙수가 감소해 호수의 수위는 150미터 이상 하강했다. 반대로 지중해의 해수면은 꾸준히 상승하면서 흑해의 수위를 넘어 보스포루스 해협의 기저부 높이까지 다다랐다. 대략 9500년 전에 이르자 지중해의 바닷물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당시 수위가 한참 낮았던 흑해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량만 놓고 볼 때 나이아가라 폭포의 약 200배에 달하는 초대형 폭포였다. 최종빙기에 흑해 연안의 호숫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매일 1킬로미터 이상 내륙 쪽으로 확장해 들어오는 바닷물에 맞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절망하지 않았을까.


다른 한편에서는 해양 쓰나미를 대홍수 신화의 실체로 보기도 한다. 10여 년 전 일본 동북 지역을 강타한 쓰나미는 전 세계에 자연의 무서움을 실감케 해준 대형 재해였다. 과거 홀로세 기간 중에도 이와 유사한 대형 쓰나미들이 존재했는데, 특히 8150년 전 북해 주변 지역에 영향을 미친 쓰나미가 유명하다. 최근 영국이나 독일 언론에 자주 다루면서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스코틀랜드 북동 해안의 퇴적물 층은 이 쓰나미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당시 파랑의 높이가 무려 15-20미터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011년 일본 쓰나미의 높이가 대부분 10미터 이하로 관측된 것을 고려할 때 상당한 크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쓰나미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지진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대륙붕에서 발생한 해저 붕괴 사태가 그 원인이었다. 홀로세 초기 해수면이 급격하게 상승하자 스칸디나비아 빙상에 의해 만들어진 모레인의 아랫부분이 불안정해지면서 무너져 쓰나미로 이어진 것이었다.


당시 북해 주변 해안에서 살아가던 선사인들은 아마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이 쓰나미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 지금은 바다 밑에 있으나 당시엔 섬이었던 도거뱅크의 고대인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쓰나미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바로 이 8150년 전의 대규모 바다 홍수가 이후 전설의 형태로 구전되어 던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홍수 신화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의 여러 도시 국가가 난립해 경쟁하던 43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중부에 아카드라는 도시 국가가 돌연 출현했다. 아카드를 세운 왕의 이름은 사르곤이었다. 사르곤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단 100여 년만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하고 세계 최초의 제국을 세우게 된다. 역사가들은 사르곤을 세계에서 다민족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막강한 군사력을 토대로 오랜 기간 번영을 구가할 것만 같았던 아카드 제국은 겨우 수십 년의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사라졌다. 막강했던 제국이 빠르게 소멸된 이유를 둘러싸고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최근 고해상의 고기후 복원 자료들이 연이어 보고되면서 제국의 몰락에 대한 궁금증이 일부 해소되는 모습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이었던 아카드 왕국 또한 갑작스럽게 도래한 대규모 가뭄을 극복하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피라미드로 유명한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고왕국 또한 4200년 전의 대가뭄으로 큰 피해를 본 과거 문명 중 하나다. 제4왕조에서 전성기를 누린 이집트의 고왕국은 제6왕조에 접어들면서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귀족들의 발호로 파라오는 점차 힘을 잃었으며, 지방 토호들은 저마다 세력을 다지면서 파라오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제6왕조의 페피 2세는 정치적 위기를 전혀 해소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복잡한 후계자 구도는 심각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페피 2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전체는 내란에 휩싸였으며 민중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렇게 허물어져가던 고왕국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4200년 전의 대가뭄이었다. 가뭄으로 나일강의 수위가 나아지면서 범람 횟수는 감소했고 농사에 필요한 물은 부족해졌다. 농경민들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찬란했던 고왕국은 무너졌다. 이후 이집트는 100년 넘게 암흑기를 겪게 된다.


4200년 전의 기후 변화는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발원한 인더스 문명에도 치명적이었다. 당시의 이례적인 가뭄은 인더스강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하천 수위를 눈에 띄게 낮췄다. 강 유역의 작물 생산량은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의 교역마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어려움은 배가되었다. 그 결과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같은 대도시조차 버려졌다.


중국의 고대 사회들 또한 동 시기의 기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양쯔강 하류의 량주 문화나 산둥의 룽산 문화는 모두 4200년 전 대규모 홍수로 큰 피해를 보았다. 장기 가뭄과 대형 홍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뭄으로 식생의 밀도가 감소하면 홍수의 강도는 커지기 마련이다. 1000년 간 유지된 량주 문화가 양쯔강의 홍수로 사라졌으며, 황허강의 홍수로 산둥 반도를 포함한 황허 유역의 입구는 급감했다. 다수의 조몬인들이 1500년 이상 거주했던 일본의 산나이-마루야마 지역 또한 4200년 전에 별다른 이유 없이 버려졌는데, 북반구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기후 변화가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유전자 분석 결과는 한반도인이 고립되어 중국인과 유전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 즉 벼 농경민이 한반도로 이주한 시기를 대략 36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집약적 벼 농경의 시작과 그에 따른 인구 증가는 2800년 전에 절정에 이르렀던 송국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송국리 문화는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대표적 문명으로 대략 3000년 전부터 집약적인 수도작을 기반으로 성장해 충청 이남의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벼 농경에서 창출되는 잉여 생산물을 토대로 오랜 기간 번영을 구가할 것만 같았던 송국리 문화는 대략 2300년 전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고 만다.


송국리 문화의 수수께끼 같은 소멸은 오랜 기간 국내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송국리 문화가 사라진 이후 벼 농경이 크게 쇠퇴했다는 점이었다. 수도작이 인구의 급증을 가져온 다음에 이처럼 외면을 당한 사례는 송국리 문화를 제외하면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찾기 힘들다. 한반도에서는 원삼국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벼 농경이 물러나고 수렵과 채집이 다시 강화되는 독특한 모습이 나타났다. 이에 국내 고고학자들은 송국리 문화의 전파와 쇠락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오랜 기간 논의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화가 단기간에 소멸한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광양에서 보고된 고기후 자료는 그 원인이 기후 변화에 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2800-2700년 전 한반도의 기후는 갑자기 나빠졌다. 소위 2.8ka 이벤트라 불리는 갑작스러운 단기 가뭄이 발생한 것이다. 이 기후 이벤트는 지금까지 유럽 학계에서 주로 보고되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광양의 꽃가루 자료는 2.8ka 이벤트의 여파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퇴적된 전체 꽃가루 중에 나무 꽃가루의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이는 가뭄으로 나무의 꽃가루 생산성이 크게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주거지 수도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주거지의 수가 크게 감소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기후 악화 탓에 작물 생산량이 급감해 많은 사람이 기아에 시달리다 죽었을 수 있다. 혹은 먹을거리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수렵채집 활동을 재개했거나 벼 농경에 적당한 환경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 결과 주거지 수가 감소했을 수 있다.


이미 정착 상태에 들어선 농경민에게 기후 변화는 악몽과도 같았다. 미세한 기후 변화에도 농경 사회는 크게 흔들렸다. 작황이 부진하다 해서 터전을 버리고 움직이는 것은 도박과 같은 행위다. 그들은 임박한 기후 변화에 대부분 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고스란히 피해를 감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양호한 환경 조건에서 농경을 시작한 초기 경작민은 저장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약간의 잉여 산물에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들이 갑작스러운 기후 악화가 가져온 생태적 충격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아예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 일대에 도착해 일본의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벼농사는 온난 습윤한 규슈 지역에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반도로 건너간 야요이인은 수도작의 높은 생산성을 기반으로 점차 인구를 늘려갔다. 그들은 단기간에 당시 일본 열도에서 수렵채집으로 삶을 영위하던 조몬인들을 몰아내거나 동화시켰다. 이때 북쪽으로 밀려나간 조몬인의 후손들이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다.


아이누족과 류큐인을 제외한 일본인 유전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야오이인들로부터 왔으므로, 일본인들에게 한반도의 농경민이 이주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랫동안 일본인 야요이 문화는 대략 2500-23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야요이의 시작 시점을 500년 더 이른 3000년 전까지로 소급시키면서 논란을 불러왔다. 지금은 이보다 조금 늦은 약 2800년 전부터 야요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본과 한국의 연대 측정 자료들 또한 이를 지지한다. 최근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봐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분리되는 시점은 대략 2800년 전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2800년 전부터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의 충격으로 농경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그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는 가설과 시기적으로 잘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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