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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Dec 13. 2021

초연결 시대의 외로움

[오늘의 한 단락]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편집자 ]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에 들어오며 시작된 정치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체제의 부상에서 새로운 징후를 읽어낸다. 전체주의라 명명된 그것은 인간 개인의 자율적인 생각과 그런 개인의 복수성이 만들어내는 공통의 감각이 서서히 소멸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봤다. 오늘날  징후를 드러내는 것은 새로운 권력으로 갈수록 힘을 키워가는 기술이다. (코로나 방역을 위한 격리와 고립 이전부터 사람들은 기술과 연결되거나 기술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는 사이 사람들과의 진정한 접촉이나 연결은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꿔 읽었을  아렌트의 저작은 날카로운 혜안의 보고가 된다.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단락에서 발췌했다.


관계의 상실과 함께 인간은 경험과 사유의 능력 모두를 잃게 된다.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는 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중략)


테러가 절대적인 지배를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은 서로 고립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며, 그래서 모든 압제 정부의 제1관심사가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데 있다는 점은 종종 관찰되곤 했다. 고립은 아마 테러의 시작일 것이다. 고립은 테러의 가장 비옥한 토양일 것이다. 또한 고립은 항상 테러의 결과였다. 이 고립은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예비 단계이다. 권력이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 "일제히 행동하는"(버크)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한, 고립을 상징하는 표지는 무기력이다. 고립된 인간은 정의 그대로 무력하다.


고립과 무기력, 즉 근본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은 항상 압제의 특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정치 접촉은 압제 정부에서 차단되고, 행동하고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파괴된다. 그러나 인간들 간의 모든 접촉이 깨진 것은 아니며 또 인간의 모든 능력이 파괴된 것도 아니다. 경험하고 제작하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생활의 전체 영역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총체적인 테러의 강철 끈이 그런 사생활을 위한 공감을 남겨놓지 않으며, 전체주의 논리의 자기 강요는 인간의 행위 능력과 마찬가지로 경험 및 사유 능력도 파괴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정치 영역에서 고립이라 부르는 것은 사회 교제의 영역에서 외로움이라 불린다. 고립과 외로움은 동일하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으면서 고립될 수 있다-즉 나는 나와 함께 행동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행동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고립되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다시 말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교우 관계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상황에 처해 있다. 고립은, 인간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추구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삶의 정치 영역이 파괴되었을 때, 그들이 내몰린 막다른 골목을 말한다. 그러나 고립은 비록 권력을 파괴하고 행위 능력을 파괴하지만, 이른바 인간의 생산 활동은 온전하게 내버려 둘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는 심지어 필요하기도 하다.


인간이 제작인(homo faber)인 한, 일과 함께 스스로를 고립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 영역을 잠정적으로 떠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으로 행위와 구분되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노동과 구분되는 제작은 비록 그 결과가 기술이나 예술 작품일지라도 항상 공동의 관심에서 벗어나 고립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은 고립 속에서 인공 세상과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창의성, 즉 공동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의 것을 더할 수 있는 능력이 파괴될 때만 고립은 전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세상은 노동이 그 주요 가치를 규정하는 세상, 즉 모든 인간의 활동이 노동으로 전환된 곳이다. 그런 조건 아래서는 생존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순전한 노동의 노력만 남게 되고 인간이 만든 것, 즉 세상과의 관계는 파괴된다. 인간이 제작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동물로 취급되며 그의 '자연과의 신진대사'가 어느 누구의 관심사도 되지 못할 때, 정치적인 행위 영역에서 자기의 자리를 잃은 고립된 인간은 사물의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립은 외로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고립에 기초한 압제 정치는 인간의 생산 능력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압제 정치는 자동적으로, 예컨대 고대의 노예에 대한 지배처럼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기도 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가 될 것이며 전체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고립은 단지 삶의 정치 영역에만 관계가 있는 반면, 외로움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가 있다. 모든 압제 정치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정부도 분명 삶의 공적 영역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즉 인간을 고립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 능력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통치 형태로서 전체주의 지배는 이 고립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생활도 파괴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전체주의 지배는 고독에,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경험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이 경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다.


고독은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인 테러의 공통된 토대이며, 전체주의의 집행인과 희생자를 준비하는 이데올로기나 논리적 타당성의 공통된 토대이다. 고독은 현대의 대중이 뿌리 뽑혀 불필요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런 현상은 산업 혁명이 시작된 이래 현대 대중의 저주가 되었으며, 19세기 제국주의의 부상과 더불어 그리고 우리 시대에 들어서 정치 제도와 사회적 전통의 붕괴와 더불어 악화되었다. 뿌리 뽑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보장하는 자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립이 고독의 예비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뿌리 뽑힘은 무용지물의 예비 조건일 수 있다. 고독의 역사적 원인과 새로운 정치적 역할을 고찰하지 않고 그 자체를 놓고 보면, 고독은 인간 조건의 기초적 요구와 모든 인간의 삶의 근본 경험 중 하나와 정반대가 된다. 심지어 물질적, 감각적인 세상에 대한 경험조차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공통 상식에 달려 있다. 이 상식은 다른 모든 감각을 조정하고 통제하며, 그것이 없다면 우리 각자는 그 자체 믿을 수도 없고 깨지기도 쉬운 자신의 특수한 감각 자료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지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로움, 즉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서 버려졌다는 경험을 실감하려면 하나만 상기하면 된다. 즉 언젠가 우리는 이 공동의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이 세상은 이전처럼 그대로 굴러갈 것이고 세상의 지속에 우리는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혼자 있기를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다른 삶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날카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몇 가지 다소 빗나간 논평들과는 별도로-이 논평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카토의 진술처럼 역설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홀로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 또는 차라리 "그가 고독 속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 (Cicero, De Re Publica, I, 17)-그리스 출신 해방 노예 철학자인 에픽테투스가 처음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던 것 같다. 그의 발견은 다소 우연히 이루어졌다. 그의 주 관심사는 고독도 외로움도 아니었고 절대적인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혼자 있다는 문제였다. 에픽테투스(Dissertationes, Book 3, ch. 13)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은 그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그를 향해 적개심을 노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반대로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며 그래서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나 혼자" 있으며, 그러므로 한 사람-안에-두 사람인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모든 사유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와 나 자신의 대화이다. 그러나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전개하는 대화는 같은 인간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다. 내가 사유의 대화를 함께 이어가는 동료 인간들이 이미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결코 오인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불변의 개인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내 정체의 확인을 위해서 나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 교유 관계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그들을 다시 '전체'가 되게 하고, 항상 불명확한 존재로 남게 되는 사유의 대화에서 그들을 구해주며, 정체성을 복구시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한 목소리로 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독은 외로움이 될 수 있다. 내가 혼자 있으면서 나 자신의 자아에게 버림받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고독한 사람들이 이중성, 애매모호성과 의혹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교우관계의 장점을 발견할 수 없을 때면 항상 외로움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 위험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역사의 기록에 남을 정도로 커진 때는 역사적으로 19세기뿐인 것처럼 보인다. 고독을 생활 방식이자 작업 조건으로 삼는 유일한 사람들인 철학자들이 "철학은 단지 소수를 위한 것이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위험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런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예는 헤겔의 임종에 관해 전해지는 일화이다. 그 이전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알려진 적이 없다. "한 사람 빼고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역시 나를 오해했다." 반대로 외로운 사람이 자신을 발견하고 고독의 사색적 대화를 시작할 기회는 항상 있다. '실스 마리아'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할 때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두 시에서('실스 마리아'와 '고산 지대에서') 그는 고독한 자의 공허한 기대와 간절한 기다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정오 무렵, 하나는 둘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치의 승리를 확신하며 이제 우리는 거행한다 / 축제 중의 축제를 / 손님 중의 손님, 친구 차라투스트라가 왔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자아 상실이다. 이 자아는 고독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정체성은 나와 동등한 사람과 신뢰할 수 있는 교제를 나눌 때에만 확인될 수 있다. 이런 자아 상실의 상황에서 사람은 자기 사유의 파트너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며, 또한 경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상에 대한 기초적인 확신을 잃어버린다. 자아와 세계, 사유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상실한 것이다.


안전하게 작동하기 위해 자아도, 타자도, 세상도 필요 없는 인간 정신의 유일한 능력은 논리적 추론이다. 논리적 추론은 사유로부터 독립되어 있듯이 경험과도 무관하며, 그 전제는 자명하다. 남을 납득시킬 수 있는 증거인 기초적 규칙, 2 곱하기 2는 4라는 자명한 공리는 절대적인 외로움의 조건 아래서조차 뒤집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인간들이 상호 보증, 즉 인간이 공동의 세계에서 경험하고 살며 알기 위해서 필요한 상식을 잃게 될 때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음직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며 진리라 할 수 없다. (현대의 몇몇 논리학자들처럼 일관성을 진리로 정의하는 것은 진리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운 상황에서 자명성은 더 이상 지성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적이 되어 그 자체 '생각'의 노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피할 수 없이 엄격하게 자명한 논리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유 과정이 고독함과 관계있다는 것을 루터는 "인간이 혼자여야 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성경 구절에 대한 논평에서 시작한 바 있다. (루터는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현상의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감히 말하기도 했다.) 외로운 인간은 "언제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부터 추론하고 최악의 경우만 생각한다." 전체주의 운동의 유명한 극단주의는 진정한 급진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바로 이 '최악만 생각하는' 경향, 언제나 가능한 가장 나쁜 결론에 도달하는 추론 과정이 바로 그 특징이다.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 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무자비한 과정 속으로 내몰고 그들을 조직하는데, 이 과정은 현실로부터의 자멸적인 도피 행각처럼 보인다. "너를 바이스로 죄는 것 같은" 변증법의 "강력한 촉수"와 "얼음처럼 차가운 추리력"은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받침대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밖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것은 내부의 강제이며, 이 강제의 유일한 내용은 엄격하게 모순을 피한다는 것이다. 내부의 강제는 한 사람을, 그가 혼자 있을 때조차 테러의 강철 끈 속에 스스로를 맞추게 하며, 전체주의 지배는 단독 유폐라는 극단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공간을 파괴하고 서로를 압박하게 만들어 고립의 생산적인 잠재력조차 말살시킨다. 외로움의 논리적인 추론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전체 과정의 출발점인 최초의 전제 조건을 묵과할 경우, 그는 자신이 완전히 파멸하게 될 것임을 잘 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의 논리적 추론을 가르치고 미화함으로써, 외로움이 고독으로, 논리가 사유로 전환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관행을 압제 정치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사막을 움직여서 사람이 지구 곳곳을 뒤덮을 수 있는 모래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오늘날 실제로 이 파과적인 모래바람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다. 모래바람의 위험성은 그것이 영구적인 세상을 건설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압제 정치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지배는 자기 파멸의 씨를 이미 지니고 있다. 공포와 공포의 원인인 무기력이 반정치적 원칙으로서 인간을 정치 행위와는 반대되는 상황으로 던져 넣는 것처럼, 외로움과 이 외로움의 결과, 즉 논리적-이데올로기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추론하는 태도는 반사회적인 상황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적 공동생활을 파괴하는 원칙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전제적,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이 조직적인 외로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곳곳에서 이제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유린하며, 더욱이나 그 끝에서 다시 나타날 새로운 시작이 스스로를 드러낼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유린하기 때문이다.


예언처럼 아무 소용도 없고 별 위로도 되지 않는 이런 생각과는 별도로 우리 시대의 위기와 그 주요 경험이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낳았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이 정부는 이제부터 우리에게 하나의 잠재력으로 그리고 항존하는 위험으로 존재할 것이다. 다른 정부 형태가 다른 기초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다른 순간에 등장했지만 그때부터 잠정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왕정, 공화정, 참주정치, 독재정치와 전제정치-인류를 항상 따라다녔던 것처럼.


그러나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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