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상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가
[편집자 주] 상상이란 단지 창작자의 몽상에 불과한 걸까. 없는 것을 지어내는 부차적인 오락이자 여흥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 인지 과학을 비롯한 여러 분과 학문들의 전언이다. 인간 특유의 인지 능력은 본질적으로 상상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은 사회성을 연결고리로 해서 언어와 이야기의 발달로 이어졌음을 다양하게 논증하는 글을 소개한다. 지식 웹진 Aeon에 발표된 에세이를 과학 계간지 스켑틱이 번역해 실었다. 허락을 얻어 발췌했다.
“내게 이 세계란 모두 하나로 이어진 공상 혹은 상상의 상像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1799년에 한 말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상상은 어떤 상태가 아니다. 상상은 인간 존재 그 자체다.” 시인이자 화가인 블레이크는 어떤 순수한 예술가의 기교뿐 아니라 이를 초월하고자 분투하는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은 피상적인 껍데기를 넘어 오직 상상력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상을 제시한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상상력은 신적인 자질이었다. 1817년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가 썼듯이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상상력은 모든 인간 지각의 살아 있는 권능이자 참된 주인이다.”
상상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힘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무언가를 지어내는 단순한 공상과는 다른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뉴런의 발화 패턴에서 상상력의 토대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상상력을 그저 운동 제어나 냄새 지각과 같이 뇌의 여러 인지 기능 중 하나로 간주하는 이런 접근법에는 아무런 감명도 받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상상력이 더 ‘중요한’ 정신 기능의 부산물일 뿐이며 지금의 목적과는 다른 이유로 진화되었다는 일부 인지과학자의 생각을 전적으로 경멸할 것이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음악이란 소리를 처리하는 기초 능력에 편승해 진화한 ‘듣는 케이크’라고 제안한 것처럼, 이들은 상상력이 부산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음악, 소리, 언어, 시각에 대한 오랜 연구와 비교해보면, 상상력의 인지 과정과 신경학적 토대를 이해하려는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다. 하지만 상상력이 인간의 복잡한 마음에서 불쑥 생겨났다거나 지루한 밤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진화의 보너스가 아니라는 근거는 이미 충분히 많다. 일군의 신경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는 상상력이 일종의 정신적 사치품이 아닌 우리 인지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상상력은 우리가 세상을 탐험하는 데 매우 강력하고 유용한 인지적 유연성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지금과 같이 탁월하게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지 모른다.
진화의 관점에서 상상력의 가장 큰 신비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고, 심지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을 떠올리고 묘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하늘을 걷기도 하고, 달에 살기도 하며, 개미만 한 크기로 줄어들 수도 있다. 잠시 눈을 감고 떠올리면 충분하니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상상하는 마음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상상력은 시각이나 기억과 달리 자연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인지 속성이 아닌 듯하다. 개나 침팬지가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거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거니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인간에 국한한다고 해도 상상력보다는 문제 해결 능력이나 산술, 사회적 협동과 같은 인지 기술이 훨씬 더 적응적으로 유리한 듯하다.
이런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학자들은 인간 진화에 있어 우리가 획득한 기술을 이정표로 삼는다.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약 230만 년 전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우리의 조상으로 ‘손재주꾼’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이름을 얻는 이유는 이들이 도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두 손을 능숙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약 200만 년 전 직립 보행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출현했고, 마침내 ‘지혜’와 ‘지식’을 갖춘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가 나타났다. 과연 이런 이름들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는 건 아니다. 유인원, 코끼리, 까마귀, 앵무새도 도구를 쓸 수 있으며, 특히 침팬지는 상당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 직립 보행은 고릴라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는 현재 인류가 걷고 있는 자멸의 길을 벗어날 때 가치 판단을 잠시 미뤄야 할 듯하다. 기억, 공감, 선견지명, 계획, 사회성, 의식과 같은 우리의 소중한 인지 능력 대부분도 다른 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정으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정신 능력은 특정 기술보다는 마음의 질質에 좀 더 가깝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을 ‘호모 이마지나투스Homo imaginatus’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우리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고자 시도하고 또 실패할수록 상상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능력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신경과학 문헌에서 ‘상상력’은 일반적으로 ‘시각적 형상을 형성하거나 회상하는 정신 능력’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소한 정의로 인간 경험의 진정한 범위와 깊이를 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자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폰을 상상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자의 형상을 떠올리는 능력은 생존 가치를 갖는데, 마음속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상황을 예행연습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자의 몸통에 새의 머리가 달린 동물을 상상하는 것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우리는 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위협을 떠올리는 것일까?
상상은 몽상을 뛰어넘고 마음과 세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테세우스는 상상이 “미지의 형상에 형체를 입힌다”라고 말하며, 상상이 실재의 결과와 표현을 낳는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견해를 피력한다. 테세우스는 이어 “거대한 지옥이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악마를 본다”라고 말하며 16세기 스위스의 의사 파라켈수스Paracelsus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파라켈수스는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와 같은 악령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강렬하고 음탕한 상상력에서 자라난 창조물”이라고 여겼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외형을 가진 신비한 괴물이 수없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이다. 상상이 가진 문제는 그걸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불가능을 상상하는 인간의 능력이 왜 진화했는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리 뇌가 진화하는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물리 법칙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이 물리 법칙을 위반하는 현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일까? 경험을 넘어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기보다는 과도한 예측이 더 나은 법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 가능한 상황을 무수히 떠올려보는 일이 다른 맥락에서 유용한 진화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면역계는 특정 항원에 작용해 이를 제거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항체를 얻기 위해 엄청나게 다양한 항체를 많이 생산한다. 또한 신생아의 뇌는 신경들이 경험의 축적에 따라 점진적으로 연결되는 식이 아니라, 무작위로 연결된 거대한 신경망에서 시작해 세상에 대처하는 데 유용한 연결만 남기고 나머지는 솎아내는 방식으로 발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잠재적으로 가능한 미래를 과도하게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 레리Paul Valé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의 과업은 미래를 생산하는 것이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마음의 진화 Kinds of Minds》(1996년)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마음을 기대 및 예측 생성기라고 말한다. 마음은 “과거에서 구한 자원을 활용해 현재에서 단서를 발굴하고 정제한 후 미래의 예측으로 전환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어떻게 구성하는 걸까?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기구들은 ‘미래 시뮬레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내적 표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의 공간 인지 능력은 세계에 대한 정신 지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그리고 다른 포유류)은 해마라고 하는 뇌 영역에 ‘장소 세포’ 라 불리는 뉴런을 가지고 있다. 공간 기억을 다루는 이 뉴런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특정 장소에 있을 때 활성화된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사물과 사람이 행동하는지에 대한 통속 물리학과 통속 심리학을 발달시켰다.
통속 심리학의 대표 능력인 ‘마음 이론’은 마음의 상태나 동기를 행위자에게 부여해 행동을 예측한다. 우리는 이런 인지 네트워크를 경험으로 채우고 정제하여 우리가 겪거나 관찰한 것들에 대한 기억을 생성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어설픈 ‘실재’의 파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은 상황에서 잘 작동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틀린 추측, 잘못된 가정과 기억이 가득하다. 놀라운 점은 이런 불완전함을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호모 이마지나투스, 즉 우화의 달인인 이유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야기가 말이 되도록 비어 있는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고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상상을 한다. 우리의 내적 삶은 많은 부분 심사숙고와 반성 그리고 목적 없는 자유로운 생각이 차지한다. 그 순간 우리 뇌는 주의 집중 없이 편한 휴식 상태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활발히 작동하고 있다. 저녁에 뭘 먹을지 계획하고, 연인과의 말다툼을 떠올리기도 하며, 지난밤에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이런 유형의 사고는 피질과 해마 등 뇌의 다양한 영역을 포함하는 잘 정의된 활성 패턴과 상관관계가 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로 알려진 이 패턴은 또한 우리가 과거 사건을 기억(일화 기억)하거나 미래의 일을 그려보거나 앞날의 일을 생각하거나 타인의 관점을 취하거나 사회적 시나리오를 고려할 때도 관여한다.
토론토 대학교의 인지신경과학자 도나 로즈 애디스Donna Rose Addis는 상상이 단순히 일화 기억과 겹치는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애디스는 이 둘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일화 기억을 회상하는 능력에 장애가 생기면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도 저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두 능력은 동일한 시기에 발달한다. 이런 관점에서 상상과 기억은 둘 다 동일한 뇌 작용에서 생겨난다. 애디스는 이를 “경험의 정신적 렌더링rendering”이라고 부른다.
상상과 기억은 감각 경험의 원재료를 일종의 내적 영상으로 변환해 ‘시뮬레이션’하는 인지 네트워크를 사용한다. 이 영상들은 소리와 움직임은 물론 정서적 반응, 해석, 평가로 채워져 있다. 애디스에 따르면, 이런 일은 우리가 어제나 내일을 생각할 때뿐 아니라 현재를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세계다. 애디스는 상상력이란 경험이라는 실을 태피스트리로 엮기 위해 필요한 유연성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애디스는 공동 연구자였던 퀸즐랜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토머스 서든도프Thomas Suddendorf가 제안한 개념, 즉 상상이란 일종의 정신적 시간 여행이라는 개념을 확장한다. 서든도프가 1997년에 썼듯이, 상상은 “과거에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 (중략)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정신적 재구성”이다. 서든도프와 그의 동료 과학자인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교의 마이클 코벌리스 Michael Corballis는 정신적 시간 여행이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형질일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물론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이 정말로 끊임없이 현재만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 만 말이다. 이와 같이 가능성에 대한 마음의 극장을 만드는 능력은 다양하고 복잡한 인지 기능들에 의존한다.
묘하게도 이 능력은 비대칭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미래는 단지 추측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렷이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에 따르면 실제 우리 기억은 사실과 환상의 교묘한 혼합물이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고 마음이 기록한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재료들을 모아 이야기를 구성한다. 우리 모두는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몇몇은 매우 상세하고 그럴듯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프랑스 그르노블 알프 대학교의 심리철학자 쿠르켄 미셀리앙Kourken Michaelian과 드니 페랭Denis Perrin이 말했듯, “기억이란 과거를 상상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는 실재란 실재와 상상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의 두 가지 유형, 즉 실재와 뒤섞인 상상과 실재와 거리가 있는 상상 사이의 차이에 의존한다. 많은 정신 질환이 공통적으로 이 두 유형의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며, 그중 몇몇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기능 이상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애디스는 이제 상상력을 순수한 시간적 능력보다 더 포괄적인 능력으로 여긴다. 중세 프랑스든, 톨킨의 가운데 땅이든, 매트릭스든, 우리는 마음속에서 ‘상상의 시공간 모든 곳’에 우리 자신을 투영할 수 있다. 내면의 극장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테세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인과 광인의 뇌는 차가운 이성으로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애디스는 뇌의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사건, 개념, 느낌과 같은 경험의 다양한 요소들을 엮어내는 연합 능력을 통해 이런 환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군의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세포군의 내용을 소환하는 연합 인지 덕분에 우리는 얼굴과 사물에 이름을 연결시키고 마들렌 향기와 같은 단일 감각 자극에서 과거를 소환해내는 프루스트적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별 노력 없이 빈틈 있는 부분적 정보에서 일관되고 풍부한 경험을 만 들어낸다.
소설가가 뇌에 저장된 기억과 믿음에 의존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인물에게 외형과 성격을 부여할 때(“이 사람은 콜린이라고 불러야겠군. 아마 민소매 셔츠를 입고 안경을 쓰고 있겠지.”) 분명 이러한 연합 능력이 작동한다. 시인 또한 이런 방식으로 “있지도 않은 헛것에 있어야 / 할 장소와 이름을 부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늘 시인이었다. 애디스가 옳다면, 예술적 상상력을 두고 내일 끼니를 어떻게 구할지 계획하는 능력이 과잉 진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추정은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상상력의 차원은 기대하고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이 발현된 전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클랜드 대학교의 문학 연구가 브라이언 보이드Brian Boyd는 이야기를 지어내길 좋아하는 우리의 성향이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는 이야기가 우리의 사회 인지에 탄력성을 더했다고 생각한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사회성이야말로 인간 마음의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우리 선조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 살고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예측할 필요가 생겼다. 누군가에게 공감해야 했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설득할 필요도 있었으며, 때로는 속임수를 써야 했다. 보이드에 따르면, “우리 마음은 특히 사회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스펠키Elizabeth Spelke와 캐서린 킨즐러Katherine Kinzler도 인간 인지의 ‘핵심 시스템’ 중 하나로 사회 정보 처리 능력을 꼽았다. 보이드는 이야기가 사회 네트워크의 훈련장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드는 자신의 저서 《이야기의 기원On the Origin of Stories》(2009년)에서 허구적 스토리텔링이 유전자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적응 형질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그는 201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 특히 허구의 이야기(놀이로 지어낸 가상의 이야기)는 문학의 주 재료이자 문학을 지배한다. 그 이유는 이야기가 사회적 마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 이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동화가 “인류 최초의 선생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주체들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는 성향과 능력, 그리고 그들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과정에서 관점을 기꺼이 나눠 가지려는 태도를 통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의 마법에 빠져 있는 동안은 주인공에게 벌어진 일들이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상상은 학습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실제 경험을 통해서만 학습해야 한다면 값비싼 실수의 대가를 치를 위험이 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경험이든 상상은 뇌가 거침없이 패턴과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이야기는 너무 진지하게 가능한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상상은 현실의 족쇄에서 해방될 때, 신경 연결을 고취시켜 말 그대로 마음을 확장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사고를 넓히는 도구’를 이탈로 칼비노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환상 문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실로 상상이 인간 고유의 강점이라면, 상상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듯한 또 다른 형질인 언어를 촉진했을 수 있다. 박테리아나 식물을 포함해 많은 유기체가 서로 소통할 수 있지만, 어떤 생물 종도 인간만큼 탄력적이고 정교하며 개방적인 언어로 소통하지는 못한다. 언어는 자주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술로 여겨진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언어학자 다니엘 도르Daniel Do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언어를 만든 건 인간이었지만, 그 후에는 언어가 인간을 변화시켰다.” 언어는 레퍼토리가 제한된 동물의 발성과 몸짓보다 명확하고 정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의사소통 도구로 여겨졌다.
하지만 도르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성은 언어의 참된 기능이 아니며, 오히려 ‘상상의 안내’가 언어의 주된 목표다. 도르는 언어가 “우리가 아는 인간 상상력이 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일 결정자였음에 틀림없다”라고 주장한다. 도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중 한 구절을 인용한다. “하나의 단어를 발화하는 건 상상력의 건반에서 한 음을 치는 것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대화 상대방의 상상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한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청자가 묘사된 ‘경험’을 종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 언어는 인간이 서로 경험을 전달하는 방법이고, “언어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닫혀 있었을 인간 사회성을 위한 장을 열었다.”
케이스 워스턴 리저브 대학교의 심리학자 멀린 도널드Merlin Donald의 말을 빌리면, 이는 언어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안부 인사, 요청, 조언, 경고, 논쟁 등 다른 많은 용도로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많은 경우 이야기와 은유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언어는 단지 소리에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 눈앞의 사물 너머의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상상하기imagine’란 어원적으로 그림, 이미지, 복사본 그리기를 뜻할 뿐 아니라 이들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활동이란 의미도 품고 있다.
또한 상상하기의 어원인 라틴어 ‘imaginari’는 그 자체가 그림의 일부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단어 그 자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가능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언어 덕분에 상상은 오늘 밤 식사를 계획하거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걱정하는 걸 넘어설 수 있었다. 기괴한 괴물이나 은하의 제국, 요정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도르는 이처럼 풍부한 상상력이 인간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동물도 정신적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무한히 지어낼 수 있다는 흔적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를 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이야기에서 너무도 중요하다.”
상상은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일지 모른다. 상상은 마음이 독립된 모듈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저차원 기능에서 고차원 기능이 생겨나는 통합 네트워크라는 걸 함축한다. 상상은 인지 능력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인지 그 자체의 주안점이자 존재이유인데, 인간의 인지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보다 단편적인 형태로만 발견되는 능력들의 결합이다. 많은 동물이 음악성(음의 고저 구분이나 리듬 타기 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만이 진정한 음악을 가진 것처럼, 많은 종이 우리가 상상력이라 부를 만한 특징을 가졌지만 인간만이 진정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선척적으로 ‘상상이 능숙’하지는 않다. 상상력은 지능만 올바로 구성되면 되는 어떤 단일한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다차원적인 속성으로 우리 모두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시각화에 뛰어나기도 하고, 연합에 능하기도 하며, 디테일에 강하기도 하고, 사회적 공감에 능하기도 하다. 음악성과 같은 다른 정신 기술과 마찬가지로 상상력 또한 발달되고 육성될 수 있으며, 반대로 제대로 훈련하지 않으면 저해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우리가 상상을 하는 동안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인간 뇌가 상상에 왜 그토록 뛰어난지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상상력을 둘러싼 선입견과 편견 또한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이 시인이나 몽상가, 공상가 등 일부 사람들의 특권적 자질이며, 나머지는 선택받은 천재들의 산물을 소비하기만 할 뿐이라는 선입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은 인류의 본질이다. 상상은 우리 뇌가 항상 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뇌는 상상을 위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 필립 볼 Philip Ball 과학 저술가로 1983년에 옥스퍼드 대학교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88년에는 브리스틀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여 년 동안 《네이처(Nature)》의 물리, 화학 분야 편집자, 편집 자문으로 일했다. NASA,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런던 정치 경제 대학교 등에서 강연하고 있으며, 여러 과학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화학의 시대(Designing the Molecular World)》 《모양(Shape)》 《흐름(Flow)》 《가지(Branches)》 등이 있다.
번역: 박선진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동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심리적 작용과 그 물리적 기반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 잡지 《스 켑틱》 한국어판의 편집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