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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19. 2019

  [스물둘,영국]#3 샬롯과 샬롯

영국교환학생 #3 거기서 거기여 보여도 같은 사람일 수는 없으니

나는 내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내 이름은 나와 퍽 잘 어울리고 나름대로 가볍지도 않으면서 부드러운 소리와 꽤 괜찮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탐탁지 않다. 이유는 너무 흔해서다.


중학교에 올라가던 겨울 방학 때였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반배정 표 엑셀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ctrl+F 를 쳐서 내 이름을 넣고 엔터키를 탁탁탁-누르자 작은 네모 테두리가 7번이나 다른 셀로 슥슥 넘어갔다. 그러니까, 그해 입학생 중엔 나를 포함해 이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무려 8명이나 있었던 거다.




지금의 나는 이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어쩌다 보니) 브런치 필명이자 내 영어 이름인 Joy. 물론 내 한본명보다는 덜 흔하지만 조이 역시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다. 레드벨벳의 조이도 있고, 어딜 가든 조이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파리에서 만난 조이
이태원에서 만난 조이


이렇게.


그렇지만 Joy 자체가 비교적 엄-청 흔한 이름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왜냐면, 영국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건 신기하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고 "뻔한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든 영화에서든 미드에서든,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 소피, 에밀리, 잭, 조지, 올리버, 마이클 그런 이름들 말이다.


물론 이민 가족 출신으로 특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조금은 더 생소한 이름들도 아-주 많다.


영국 생활 초반엔 이름처럼 사람들의 외모도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야 그때의 내가 이해가 안 가지만, 솔직히 처음엔 백인들은 백인들대로, 중동계 사람들은 중동계 사람들대로, 좀 익숙한 한중일 동아시아 아이들을 빼면 다 자기들끼리 똑같이 생겨 보였다.


오늘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구별하지 못해 면인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의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영문과 생인 나는 첫 학기에

Christopher Marlowe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 The Elegy(비가, 슬픔을 노래한 시), Renaissance Literature(르네상스기의 문학) 이렇게 세 개의 수업을 들었다.  


그 학기에 맨 처음 들어갔던 게 Marlowe 수업이었다.


자기소개라도 시키는 건 아닌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강의실로 향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실 앞쪽에서 한 남자가 리모컨을 손에 들고 빔프로젝트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방송인 타일러처럼 똘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삼십 대 중반 정도의 교수님이었다.


많아야 스무 명 남짓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작은 방. 서너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나는 대충 뒤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수업이 시작되려는 와중에 키가 크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긴머리의 백인 여자 애가 뒷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왔다. 그 애는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와 앉았다.


아직 긴장도 되고 어색하지만 당시의 나는 샤이 아시안 Shy Asian의 편견을 가 깨 주리 하는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옆자리의 그 애에게 노력을 한껏 더한 웃음을 띠며 인사와 함께 내 이름을 건넸다. 답례로 돌아온 그 아이의 이름은 Charlotte이었다.


수업이 곧장 시작되어 별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수업에 아는 사람이 기다니! 왠지 설렜다.



그리고 아마 다음날이었을 거다.


또 다른 수업인 <르네상스 문학> 첫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건물에 들어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옆에는 친구인지 얼굴이 조막만 한 단발머리의 여자 아이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한 오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반가움에서였는지 아주 당차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Hey, Charlotte!


멀리서 제 이름을 들은 그녀는 누구인지 나를 알아보려는 듯 고개를 조금 더 앞으로 빼고 눈을 찡그다. 몇 걸음 뒤 좀 더 가까워졌을 때 나는 그녀의 눈과 얼굴의 모든 근육에 묘하게 띠어있는 당혹감 알아챘다. 상할 정도로 어색해 보이는 샬롯은 에게 'Hey, ' 하곤 슥 지나쳐갔다.


왜지, 무슨 일이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그 날 그리 오래 마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니... 그렇다해도 어딘가 서운한 마음을 품은 채 목적지인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수업은 영문과 학생들의 필수과목이어서 특별히 큰 대강의실에서 열렸다. 나는 중간보다 약간 앞쪽 자리에 앉아 두리번대며 주변을 살폈다.


어, 아까 샬롯이랑 같이 있던 그 단발머리 여자애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샬롯...인데 뭔가 이상하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몸짓을 보니 어딘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다. 저렇게 깨발랄한 분위기의 애는 아니었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저 앤 샬롯이 아니다!


그럼, 내가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그리 반갑게 인사를 한 거구나... 한껏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앞으로 홱 돌렸다.




대형강의가 있고 며칠 뒤 다시 르네상스 수업 소형 세미나가 있었다.

▨각 수업은 [교수님의 강의+ 학생 참여 위주의 세미나]로 구성되어있었다. 그중 르네상스 수업은 대형강의여서 수많은 학생들이 대강의실에서 강의는 같이 듣고, 그 안에서 세미나 그룹(10명 이내의)이 다시 나누어졌다.


그리고 명의 장난인지 며칠 전 복도를 지나가다 졸지에 샬롯이 되었던 그 여자애를 세미나에서 다시 만났다. 긴 생머리를 한 사오십 대 정도의 여자 교수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각자 돌아가며 이름과 함께 르네상스 문학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나는 끝자리에 앉아있어서 마음속으로 멘트를 준비할 일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내 소개를 준비하느라 다른 애들 얘기는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듣는 척 열심히 고개는 끄덕였다. 그러다 그애 차례가 왔다.


그 땐 무의식 중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런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샬롯이 아니었던 그녀가 자신을 샬롯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


그렇다. 내가 샬롯으로 착각했던 이 아이의 이름 역시 샬롯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나, 이게 가능한 일이냐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이 샬롯 no.2는 복도에서 내가 인사를 건넸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누군데 내 이름을 알지? 왜 기억이 안나지? 내가 사람을 이렇게나 못알아보는건가? 하고 도리어 자신의 안면인식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범인은 나인데.


사실 그 이후에 개인적으로 이 둘 외에 알게 된 또 다른 샬롯은 없지만, 검색해보니 앞으로 미래에 샬롯 no.3을 만날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있는 것 같다.


BBC에 소개된 국가통계조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Charlotte은 가장 흔한 여아 이름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2,394명의 샬롯이 태어났단다. 감소된 수치이니 2017년생들 위로는 더 많은 샬롯들이 있겠지?


참고로
-2017년생 조이는 70명으로 604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2017년, 가장 흔한 영국 아기 이름은 Oliver와 Olivia란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2019년에 샬롯은 19위를 차지했다.




글을 거의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캐나다 드라마 Kim's Convenience (김씨네 편의점)을 보다가 우연히 비슷한 소재를 마주쳤다. 극 중 인물 재닛은(한국계 캐나다인이다) 흑인 여성 두 명을 혼동하곤, 자신의 행동이 "흑인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 라는 인종차별의 표출인양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닮아서 착각한거라고.



그러다가 자신 역시 다른 아시아인과 혼동되는 경우가 잦다며 억울하다는 듯 호소한다.

 


그런데 재닛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의 오빠 정이 허를 찌르는 지적을 한다.  



정의 지적이 왜 날카로운 질문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나와 다른 인종의 두 사람을 혼동했다>는  

이 이야기와 내 일화의 유사성, 그리고 동시에 실수에 대한 재닛과 나의 반응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똑같이 사람을 실수로 헷갈린 것뿐인데

왜 재닛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나는 그 실수를 소재삼아 웃으며 글을 쓸 수 있냐는 거다.


재닛의 죄책감은 그 두 사람이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정은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이 비슷해서 헷갈린 거 아냐?"라며 흑인 두 명을 똑같은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재닛의 과한 리액션을 역으로 인종차별일 수 있다 지적하는 것이다. 재닛은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의 다른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내 경우엔 혼동의 대상이 두명의 백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나의 실수에 '인종차별'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죄책감을 느낄 바가 없었던 거다.


백인들은 인종차별이라는 악습의 희생자가 될 일이 없다는 일반적인 가정에 무의식 중에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문제는, 이 가정은 인종적 위계의 존재를 인정할 때만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헷갈린 샬롯들이 흑인 여성이었다면, 이렇게 피식 웃으면서 '나의 안면인식 장애' 같은 농담조의 말들을 끌어다가 이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인종차별적 소재는 아닌가 하며 무의식 중에 조심스러워지지는 않았을까.


정의 지적대로라면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오히려 깊숙하게 박혀있는 인종적 위계에 대한 의식을 고착화하니, 오히려 조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게 "조심스러움"을 허물어 나가야 한다면 그 과정에서 현실적으로는 깊이 고착되어 존재하는 "민감함"에 어떻게 대처를 해나가야 할 것인가.


갑자기 이런 문제의식이 주어지니 웃으며 신나게 써나갔던 이 글의 마무리가 어려워져 버렸다.


이 문제에 대한 글은 나중에 또 길게 써보기로 하고, 우선 이 글은 여기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이름이든 외모든 (+피부색이든) 비슷해 보여도 절대 같은 사람일 수는 없는 법, 거기서 거기일 수는 없는 법>이라는 생각을 되새기면서.









*참고 1 [2017년 영국 아기 이름]

https://www.bbc.com/news/uk-england-45559619

*참고 2 [2018-9년 영국 아기 이름]

https://www.cosmopolitan.com/uk/reports/a26971152/most-popular-baby-names-2019-uk-so-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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