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맞고, 나도 맞다
"엄마~ 형아가 날 모험했어!"
오늘도 2호는 고자질하러 달려온다.
호시탐탐 형아의 허점을 발견하고, 놓칠세라 바로 달려와 나에게 보고를 하는데 어딘가 늘 2% 부족하다.
"모험이라니, 어딜 모험하러 떠났어? 인체탐험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형아가 나한테 비인식적으로 웃었단 말이야."
"비인간적이겠지."
2호는 본인이 아주 냉철하고 비판적이며 이성적이라 생각한다.
코로나 시기 집에서 혼자 꼬무락거리며 만든 공룡 레고를 보여주며,
"엄마, 내가 심열을 기울였어." 내지는,
2호가 쓰던 저금통에 1호가 돈을 넣었던 사실을 부정하며,
"이것은 명박한 제 돈입니다"라고 말하는 둥.
현실과 이상은 이다지도 간극이 크다.
나 몰래몰래 게임하다 걸려서 열이 올라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며
"넌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묻자,
"죄송합니다. 심한 잡책감이 들어요."
아... 너란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의심이 되었지만,
2호의 첫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진심? 이란걸 알았다.
1학년 2학기.
2호의 첫 받아쓰기 점수는 10점이었다.
우리 둘 다 다소 충격을 받긴 했지만 뭐 어떠랴~ 연습하고 다음에 잘 보자! 파이팅을 날렸다.
덕분에 그다음 시험에서는 20점을 받았다.
"좋았어! 상승하고 있어. 이대로 쭉~ 오르면 되는 거야!!"
그다음 시험에서는 무려 40점을 받았다.
열심히 연습한 거 같은데, 늘 점수는 50,60점을 맴돌았고,
시간이 흘러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즈음 딱 한 번 100점을 받아왔었다.
기뻐서 2호와 얼싸안고 축하를 날려주고 끝냈어야 했는데, 궁금증은 못 참지...
"너네 반 100점은 몇 명이야?"
"글쎄. 한 20명?"
"그래~ 정말 잘했네. 축하해!!"
한 반에 27명인가 28명이었으니 꼴찌는 아닌 걸로.
몇 해전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책의 에피소드가 가끔 생각난다.
어릴 적 피겨스케이팅 선수 시절을 잠깐 보내고, 본인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꿈을 접는다. 15년이 흘러 성인이 되고 일상의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어느 날, 스케이팅에 대한 열정이 생각이 났고, 개인코치를 구해 연습을 시작한다. 일주일에 3번, 직장에 출근하기 새벽시간에 늘 연습을 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빅매직"에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그다음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어떤 챔피언 메달을 수상했답니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사실 이 이야기에는 결말이랄 게 없다.
왜냐하면 수전은 여전히 일주일에 몇 날 아침은 피겨 스케이트를 타다가 출근하니까.
100점 한 번 받고 나서 2호가 계속 100점을 받았냐고?
그렇지 않다.
50~70점대를 자유자재로 오갔고, 5학년이 된 지금도 수두룩하게 틀린다.
그러니 "형아는 피렴치 하다"며 나에게 또 고자질하러 오지 않는가.
"파렴치란다."라고 정정해 주지만 잘 입력이 됐을까는 미지수다.
나는 사실, 관광지에 갈 때면 유물, 유적 안내문을 챙겨보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안내문에 맞춤법이 틀리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놀라운 건, 2호의 엉성한 맞춤법을 나는 좋아한다.
2호가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건 칭찬할 일이고,
틀린 맞춤법에 주눅 들지 않는 게 고마운 일이니까.
나의 부캐 한우리쌤은 수업시간에 2호에게 맞춤법 하나하나 지적하지만,
수업 후 뒷정리 시간이 되면 2호의 글을 유쾌하게 다시 읽어본다.
'아차, 아까 이걸 고치라고 말 못 했네~' 이럼서.
지난주에 2호와 시간이 남아서 잠깐 와플대학에 간식 먹으러 갔다.
1호 없이 (1호 몰래였나. 기억은 희미하지만) 둘이 와플과 아이스티를 말없이 즐기는 중에 2호가 말을 건네왔다.
"엄마의 요즘 관심사는 모예요?"
"응? 관심사?... 너네"
"엄마가 요즘 좋아하는 건 모예요?"
"음.. 좋아하는 거라... 너네"
2호가 부담스러워하며 와플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 요즘 이무진 노래 좋더라."
"왜요?"
"음... 엄마 10대, 20대가 생각나서. 친구들이랑 놀았던 거, 그런 거."
"지금도 가끔 놀잖아요."
"그렇긴 한데, 친구들이 다 멀리 살아서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어.
그리고 옛날엔 그때그때 서로 고민 얘기도 하고, 나중에 어디 갈까, 뭐 하고 놀까,
미래에 대해 얘기했던 거 같은데 이제는 그간 밀린 얘기 하느라 시간이 모자라."
2호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너네 얘기도 많이 해"
"왜요?"
"다들 이제 애를 키우니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다, 잘해보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거 같다...
그런 얘기들을 더 많이 하게 되네"
2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도 그래요."
"그래? 너네도 그렇구나..."
2호의 양손 크기만 했던 와플은 어느새 손가락만 해졌다.
양볼 가득 찬 햄스터가 야금야금 먹듯 작아지는 와플만 서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생각했다.
각자의 친구들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침묵을 깨고 2호가 말했다.
"엄마 근데 왜 울상이에요?"
"... 그 표현이 지금 맞는 건가?"
"왜요, 아니에요?"
"아냐~ 맞나 봐. 너도 맞을 때가 있네."
맞춤법 좀 틀리면 어떠하랴.
글씨를 좀 못 알아보면 어떠하랴.
시간 속에 얽힌 내 마음을 찬찬히 읽어 주는 2호가 고마웠다.
12살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P.S
얼마 전, 정리가 안 된 책상을 보며 0호가 1,2호를 향해 잔소리를 했다.
"너네 아주 잔소리가 듣고 싶어 적성이 났지!!!"
조그맣게 말해주었다.
"직성이야,.."
2호는 0호의 자식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