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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20. 2018

#126. 죄 많은 소녀

누가 누구를 죄 많은 이로 만드는가.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1.


같은 반 친구 경민(전소니 역)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 역)는 가해자로 지목된다. 경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진 이들은 이 곳에 갑자기 생겨버린 공백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소중한 이를 잃은 친구들도, 소중한 딸을 잃은 부모도, 이 사건을 책임지게 된 다른 이들도 모두 스스로 그 공백에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고 가장 그럴듯한 영희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흔들림을 멈추고자 한다. 그리고 그 커다란 의심과 옥죄어오는 심리적 억압 속에 영희는 스스로의 결백을 내보이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영화 <죄 많은 소녀>는 갑자기 목숨을 끊은 소녀 경민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두고, 주변 인물들이 보이는 그릇된 애도의 방식과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다른 희생양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조금의 변주도 없이 직접적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실제로 과거에 친구를 잃었던 적이 있었던 김의석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는 이 영화는 누군가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름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 다니던 감독 스스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한다.


02.


영화는 도입부부터 꽤나 강렬하다. 웅성거리는 여고생들 앞으로 등장한 한 소녀. 기다리던 친구가 돌아왔다는 선생님의 소개 뒤로 아무 말 없이 뜻을 알 수 없는 수화로 자신의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다. 이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관객들에게 그녀의 행동은 의문투성이일 수 밖에 없지만, 후반부에 다시 한번 활용되는 영화의 동일한 장면을 통해 그녀가 영희이며, 그 소녀가 수화로 전한 말의 의미가 ‘여러분이 그토록 원했던 나의 죽음을 가장 멋지게 완성하러 왔습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수화의 의미가 공개되지 않는다. – 이와 같은 연출은 수화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여고생들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장면을 처음 접하게 되는 관객들의 시선을 동일한 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녀의 상황과 진짜 속내를 알고자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과 러닝타임을 따라 그녀에 조금씩 밀착하게 되는 관객들의 심리는 그 간극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해, 수화의 의미가 등장하는 후반부에서는 극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03.


크게 두 가지 내러티브를 끌고 나아가는 영화 <죄 많은 소녀>에는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영희의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짓누르고 자신만큼은 선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이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 작품의 핵심을 후자의 문제로 붙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하는 영희의 이야기 안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안전과 위안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상당히 서늘하게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무엇을 증명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추악하다. 그 행위 자체가 추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추악하다는 것이다.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경민과 영희는 새 학년이 되어 조금은 소원한 사이가 되고, 그 사이에 한솔(고원희 역)이 끼어들게 되면서 묘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영희와 경민의 입맞춤이 CCTV에 찍혀있었던 것은 애정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다. 생리로 인한 심한 출혈로 양호실을 찾은 영희에게 꾀병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교사에게 직접 생리혈을 확인시켜주는 그녀의 행동 역시 자신의 상황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유독 물질을 기어이 입 안으로 들이붓고 자살을 시도하는 영희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상황 이전에 영희에게 가해졌던 의심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와는 이미 다른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쩌면 감독은 타인을 위해 나의 무엇을 증명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만일지도 모르는 필사의 몸부림, 그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상황보다 더 추악한 것이 어디 있을까.


04.


영희가 왜 희생양이 되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 중 하나다. 그녀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마지막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혹은 경민에게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죽음의 방법에 대해 일러주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그 모든 의심과 죄악을 뒤집어 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죽음을 택한 경민과 가장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친구이자, 오랫동안 깊은 우정을 쌓아왔지만 마지막 순간에 잠깐 다툰 친구로 가장 많은 위로가 필요했을 인물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죽음의 방식으로 친한 친구가 실제로 죽음을 택했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전에, 경민이 진짜 그 방법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영희는 그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자신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항변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영희는 경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유복한 집안의 착실한 딸이었으니 말이다.


영희를 향한 동급생 친구들의 행동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여기에서 이해는 마음을 헤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저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줄 대상이 필요하고, 죽은 친구를 대신해 자신들의 정의를 투영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실재하지 않는 우정을 확인하고 자신의 슬픔을 실체화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희의 자해 사건 이후, 그녀를 의심한 자신들의 행동을 또 한번 정화하기 위해 이번에는 다른 희생양을 준비하는 – 마치 때가 되면 신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듯 – 그들의 모습이 이를 반증한다. 여기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영희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난 뒤에야 동영상으로 만든 조잡한 인사 몇 마디로 과거의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아닐까? 어쩌면 영희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05.


실질적으로 영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른의 사정이다. 죽은 경민과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의심부터 하는 형사와 이 사건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자 하는 담임 선생님(서현우 역). 역시 같은 이유로 끝까지 영희를 놓아주지 않는 경민의 엄마(서영화 역)까지 모두 말이다. 이들 모두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 행위의 중심에는 죽은 경민도, 상처받은 영희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 스스로의 안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사는 찾을 수 없는 직접적인 증거 대신 영희의 증언, 최대한 이 사건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증언만을 이끌어 내고자 하며, 담임은 이 사건이 자신과 학교의 명예와 안위에 부담스러운 상황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경민의 엄마 역시 자신의 완벽한 삶에 – 사회적 커리어, 단란하고 건강한 가정, 착실하고 예쁜 딸 – 흠이 될 법한 딸의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학교에 딸의 이름으로 된 장학 재단을 설립하고자 하는 이유도, 그녀의 보험금으로 영희의 병원비를 대면서까지 영희를 옭아매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래도 영희의 극단적인 선택 이후에 겉으로나마 행동을 바꾸어 가는 동급생, 아이들과 다르게, 어른들의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어떻게든 표현하기 위해 울부짖는 영희에게 담임은 ‘이때까지 어른들이 다 신경 써주고 그런 거지’라며 오히려 화를 낸다. 그녀의 눈덩이에 멍이 왜 들어 있는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해가며 자신을 변호하려 드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자해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영희가 학교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 담임은 영희에게 나아가려면 잊어버려야 한다고, 이럴 때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며 이야기하지만, 그 속뜻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하다.


06.


이 작품 <죄 많은 소녀>에는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는 관계나 사건에 대한 부분이 수 차례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의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희와 경민 엄마의 대화에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정확하게 적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태도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시도하는 경민 엄마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전복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영희를 가해자로 지목해 왔던 경민 엄마가, 마지막에 이르러 영희의 지목에 무엇인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사실, 누가 경민의 죽음에 더 많은 원인을 제공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증명할 길이 없어 보이는 모든 인물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역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은 역시 추악하다는 것.



07.


이 영화에서 죄 많은 소녀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영희에게 정말로 경민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렇게 하리라는 마음을 갖는 순간에, 무엇을 숨기고 어떻게 이용해 나갈지를 확인하는 일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무고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담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에는 나의 행동으로 인해 눈 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상황의 무게가 짓눌러오는 자괴감을 끝까지 모른 척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다 떨쳐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가장 크게 요동치게 될 테니 말이다. 죄 많은 이가 죄 많은 이를 만든다. 그리고, 죄 많은 이를 만든 이가 죄 많은 이가 되고 만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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