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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r 23. 2024

차가운 새들의 세계

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3 : 극장에서 쓰는 편지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 이상의 층위를 갖는다. 스크린을 기준으로 한 물리적 층위가 될 수도 있고, 내러티브나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비물리적 층위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영화들은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미 쪼개져 있는 것 말고 자신만의 기준을 다시 세워 그 층위를 더 나눈다. 이 경우 물리적 층위가 기준이 되는 경우는 조금 드물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일반적 환경 위에서는 구현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대부분 후자가 활용된다. 그렇게 완성된 층위의 세계는 관객들에게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 다소 모호하고 때로는 이상함에 가까운 감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완성해 낸다.


극영화이면서도 실험영화에 가까운 <차가운 새들의 세계>는 앞서 설명한 새로운 층위로의 시도를 충실히 해내고 있는 작품이다. 비디오와 오디오가 포함된 물리적인 쪽과 주요 화자인 내레이션의 언급을 통해 분절되는 내러티브, 양쪽 모두의 층위를 통해서다. 양쪽에 놓인 각각의 층위는 서로 어떻게 마주하고 연결되느냐에 따라 조금 다른 감상을 낳게 되는 듯 하지만,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의 결말에는 오롯이 닿게 된다.


“이것의 세 개의 이야기다. 그중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머지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 이야기다.”


처음에 놓이게 되는 이 문구에는 영화의 비물리적 층위가 갖고 있는 세 가지 모습이 설명되어 있다. 이 영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관객이 따를 수 있는 시선의 갈래를 미리 놓아둔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놓인 실제 현상과 상태에 따라 하나의 길을 따르게 된다. 마지막에는 모두를 이해하며 갈래의 사잇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트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된다.


02.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3명이다. 프레임 속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희조(정수지 분)가 있다. 그녀의 모습 뒤로 등장하는 목소리 역시 그녀다. 두 남자도 있다. 한 사람은 이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희조가 계속해서 말하는 남자 이수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런 이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은 철물점 주인 남자다. 희조와 달리 두 남자의 모습은 프레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여자의 말 안에서만 떠도는 존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두고 두 인물은 분명히 다른 곳에 놓여 있으나 같은 공간에 놓여 있기도 하다.


각각의 인물은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타인의 이야기에게 쉽게 융화되지 않는다.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모습으로 경계를 만든다. 화자인 희조가 이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그 층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여자는 이수라는 남자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심지어 철물점 남자는 이수를 모티브로 한 소설까지 쓰고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희조가 소설을 쓰는 남자와 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두 사람이 새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지난 산책길에 길에서 마주한 새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자는 자신이 가진 새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할 뿐이다.


서로 뒤섞이지 않는 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가 비물리적 공간에서 자신의 층위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앞서 제시했던 두 개의 문장에서부터 벌써 복선처럼 보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일어난 일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는 같은 맥락에 놓여 있으나 결국 서로 정확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사건 위에 부유하고 있을 뿐이고, 이야기의 양면은 서로 닿을 수 없으니까. 극 내부의 희조와 이수, 철물점 남자의 관계도 그렇다.



03.

한편, 물리적인 층위를 나누려는 시도는 화자의 독백과 이름 모를 속삭임이 교차하며 말을 이어가는 순간에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시작에서도 시각과 청각의 형태적 분리는 찾아볼 수 있다. 정확히 나뉘는 것은 화자가 생각하는 이수에 대한 기억을 읊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파에 기대 누운 상태로 책을 들고 미동도 하지 않는 희조의 이미지는 홀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목소리와 한 번 분리된다. 이미지로부터 이탈한 소리는 다시 한번 희조의 것과 희조의 것이 아닌 것으로 층위가 갈리게 된다.


두 목소리가 서로 의미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지, 이 이야기의 내용이 이미지와 어떤 의미를 두고 상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해석하고 감독의 의중을 답안지를 작성하듯 맞춰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해석의 갈래는 이미 여러 개로 나뉘고 난 뒤다. 하나의 프레임 속에서 물리적인 구분이 시도되고 있으며 관객 혹은 시청자가 이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역시 여기에도 앞서 제시된 문구가 정확히 적용된다. 명확한 것은 이미지의 층계가 일어난 일, 사건에 해당될 것이고 두 목소리는 남은 두 이야기에 대응될 것이라는 점이다. 역시 어느 쪽인지는 수용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것을 비물리적인 층위로 해석하자면 언급되고 있는 이수의 이야기 자체가 사건에 해당되게 된다.)


04.

작품 속에는 시점을 명확히 특정할 수 없는 장면이 놓여있기도 하다. 내레이션 혹은 화자가 희조라는 인물로 추측되는 상황에서도 장면의 시점을 그녀라고 확언할 수 없는 경우다. 가령, 철물점 주인 남자가 종종 바다로 나가 해파리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설명할 때, 카메라의 시선은 역시 바닷가를 향하지만 그것이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후반부에서 남자를 찾아 호수로 간다던 여자의 말이 놓인 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쉽게 생각하면 그 시선은 분명 여자의 것이어야 하지만, 여자보다 먼저 호수로 향했을 남자의 시선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 또한 하나의 층위로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물리적/비물리적 층위가 명확한 층위에 해당한다면, 이 시점에 시도되는 층위는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 시선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내재된 의미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 화자와 시선의 주체가 동일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발생하는 차이 역시 또 다른 분절에 속한다. 호수를 향하는 여자가 지금 바라보는 것이 남자의 흔적인지, 이미 떠난 남자가 길을 찾아 목적지를 향하는 것인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05.

이 영화 <차가운 새들의 세계>를 극영화이자 실험 영화라고 소개한 것은 그래서다. 분명히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관객은 그 의미를 쉽게 따를 수 없다. 어쩌면 각각의 자리마다 분절된 층위를 따르는 동안 자신이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최종적인 목표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새들의 세계’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새는 사람과 대응할 수 있고, 차가운 사람은 다시 남자 이수와도 연결된다. 죽음. 사람은 다시 극 중의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닿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닫히지 않는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는 조각조각 흩어지고 여럿으로 파열되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한국 / 실험영화 / 2022 / 26분 8초

감독 : 강예은

출연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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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세 번째 큐레이션인 ‘극장에서 쓰는 편지’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3월 16일부터 3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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