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Mar 27. 2024

어린 시절의 입양, 진정한 이방인이 되기까지.

[넘버링 무비 24] 영화 <조용한 이주>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한국 영화사에서도 디아스포라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재미교포 영화감독, 배우들과 함께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 코리안 디아스포라’ 섹션을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있어 정체성은 중요한 문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방식이나 장르의 활용에 제한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형태와 모양은 달라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잉태하게 되는 공통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정체성과 상실에 대한 문제는 인류 보편의 정서에 닿아 감정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화 <조용한 이주>를 연출한 말레나 최 감독도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경험이 있다. 코리안 아메리카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속한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칼(코르넬리우스 원 리델클라우센 분)이 덴마크에 입양된 배경을 가진 청년으로 그려지는 까닭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녀는 전작인 다큐멘터리 <회귀>(2018)에서도 덴마크로 입양된 한국 출생의 두 인물이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찾아 서울을 방문하는 이야기를 그린 바 있다. 그 과정에서 갖게 되는 혼란스러운 감정과 정리되지 못한 기억들에 관한 기록이다.


형태적으로 이야기가 덧씌워지기는 했지만 이번 작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신의 현실 속에 오롯이 동화되지 못한 채로 부유하는 한 인물의 모습이 영화 속에 그려진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에 대한 깊은 갈망도 함께다. 감독은 그런 인물의 믿음을 흔들고 경계로 내모는 것들이 모두 외부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02.

칼은 양부모를 도와 농장을 운영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입양해 준 덴마크 부모의 일이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에 스스로의 의지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미건조하다는 것. 소를 돌보는 일의 매일이 단순히 반복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말 수도 적다.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도 어느 정도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서도,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인물의 등을 자주 비춘다. 분명 일반적인 용법은 아니다. 매 순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순간마다 찾아오는 앵글의 답답함과 어딘가 꾹 막힌듯한 모습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의 어느 한적한 농장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과 좌우 대칭을 맞춰 지어진 거대한 축사. 그 안의 소들은 언뜻 봐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같은 모습이다. 이제 갓 태어난 송아지도 제 부모를 닮는다. 아직 덜 자란 새끼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한 인물을 뾰족한 자리로 내몰기 위해 영화가 이를 놓칠 리 없다.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버지 한스(비야느 헨릭슨 분)와 어머니 카렌(보딜 요르겐센 분). 여기에서 혼자인 존재는 칼 하나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 조금 알 수 있다. 칼이라는 인물의 삶이 왜 이토록 건조하고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적어도 외면으로 드러난 이유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다르기 때문은 아니다. 일종의 부조화다. 그는 지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리에 서 있다. 차라리 의사소통이라도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정체성을 선택하거나 붙들 수 있는 정도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놓아둘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는 외부와 온전히 동화될 수 있거나 완벽히 차단될 수 있을 때 오히려 더 안정감을 느낀다. 그는 정확히 경계의 자리에 놓여 있다. 아니, 그 경계의 자리에라도 서 있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있다.



03.

그는 삶의 외부 곳곳으로부터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어떤 순간의 돌발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장면이다. 많은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커튼 뒤로 황급히 몸을 숨기는 어린 칼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그가 지나온 시간 모두가 그려진다. 지금도 때때로 마을에서는 그를 향한 인종 차별이 행해지곤 한다. 어릴 때부터 함께 배우고 자란 그들의 말을 할 뿐인데 알아듣지 못하겠다며 망신을 주는 식이다.


“넌 네 고향으로 가면 되겠네, 칼.”


가장 따뜻해야 할 가족의 품 안에서도 그의 존재를 마땅해하지 않는 이들은 있다. 자신의 생일까지 미루고 참석한 이모의 생일에서는 삼촌 피터(요엔 호이에르슬레우 분)로부터 그는 차별이 담긴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물론 가족 모두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태도 하나가 칼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가늠할 수 없다. 어떤 행동 하나는 누군가의 세상 모두를 망가뜨릴 정도의 치명적인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작은 시퀀스의 마지막에서 동양인 여성과 함께 복도에 앉아 있는 장면,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화면이 이내 곧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움직이는 장면에는 어떤 동질감과 감정의 전이가 놓인다.


이 영화에는 밭에 떨어지는 운석 하나가 등장한다.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지는 이 장면에서 증폭되는 것 역시 감정의 전이다. 그 중심에는 칼이 있다. 운석은 우주에서 지표로 떨어진 암석을 통칭하는 말이다. 언제 어디로 떨어지는지 알 수 없으며, 거의 대부분은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무생물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낙하했을 것이다. 극 중 칼의 상황도 그렇다. 운석과 칼은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덴마크 사회에 떨어진 이방인과 지구에 떨어진 (사람은 아니지만) 이방인. 그리고 이 두 존재가 공유하는 감정은 운석이 낙하하는 장면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이된다. 어느 곳으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운석의 속성과 어딘가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이들의 심리를 결합한 상태로 낙하한다.


04.

같은 맥락에서 운석과의 만남은 칼의 감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직면하게 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영화는 ‘칼이 변한 것 같다’는 엄마 카렌의 말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언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존재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고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해 온 이의 그런 촉각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엄마는 아들 칼에게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다. 처음 TV에서 남한의 이산가족 뉴스가 전해질 때도 제일 먼저 칼의 눈치를 살폈다. 아들의 입양 기록을 우연히 엿보게 된 이후에도 역시 그렇다. 칼의 지연된 생일 선물로 해외여행을 보내주자는 엄마의 제안은 아들의 뿌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의지와도 같다. 현실적인 문제를 이유로 들며 약간의 난색을 표하는 아버지의 태도와 자신의 진심을 비켜나려는 아들 칼의 모습 정가운데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마음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다. 칼을 입양하기까지 그녀에게도 상실의 아픔이 있었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상흔으로 남아 있다. 우울증이다. 지금까지 칼의 사정에만 카메라를 들이밀던 영화가 처음으로 타인의 영역에까지 시선을 옮기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을 이끌고 가던 칼의 사정에 부모의 사정이 더해지면서 이제 이 이야기는 가족의 것으로 화두를 넓히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과, 가족의 그런 호의적이고 안전한 마음속에서도 결코 지울 수 없었던 장면과 같은 것들.



05.

말레네 최 감독이 칼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이방인의 이야기를 위해 소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몇 있다. 칼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차별과 장벽을 그저 표현하고만 있지 않는 것은 그중 하나다. 그녀는 칼이 지금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더 다양한 장면 속에서 정확히 묘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감정을 감히 추측하거나 쉽게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축사의 건초 더미에서 잠이 드는 장면도, 자신의 키만 한 옥수수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도, 높게 쌓인 짚 더미 주위를 홀로 배회하는 장면도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칼이 존재하는 영화 속 현실이 그를 배척하는 일들로 장벽을 쌓아왔다면, 영화는 칼을 바라보는 동안에 그의 심리가 외부로 발화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쌓아간다. 지난한 과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렇게 부정당하는 삶마저 부채감 위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형태적으로는 동일한 부모의 도움일지 모르겠으나, 결코 같을 수 없다. 빚진 마음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말들이 생기고, 자라나는 마음도 쉽게 꺼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의 마음을 꺼내기까지 오래 돌고 돈다. 그조차 칼의 진짜 속내보다는 어려울 수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더 비슷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저 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한국으로요.”


뿌리를 찾을 수 없어 물러서지도 못한 채,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땅의 비좁은 곳에 매달려 있어야 했던 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속내를 꺼낸다.


06.

어느 자리에서든지 일단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칼 역시 마찬가지다. 1년 전부터 좋지 않았던 아버지의 허리 디스크가 터져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를 대신해 농장과 축사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명의 이전을 해야 하는 등의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어렵게 마주한 진심과 그를 위한 행동을 다시 또 미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 또한 하나의 장벽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동안 그를 짓눌러왔던 장벽과는 분명히 다른 모양이다.


그동안 칼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표현을 썼다. 건조함, 상실감, 부채감 등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그가 과거의 어떤 선택도 스스로 하지 못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가지지 않아도 될 무게를 짊어진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또 다른 빚진 마음을 떠안게 될까, 더한 실례를 저지르게 될까 두려운 탓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게 되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칼의 성장에 대한 증명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비로소 그는 경계를 방황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이방인이 된다.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은 막연히 상상만 해오던 순간들을 현실에서 마주하며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 다가올 모든 장면은 스스로 걸음을 나아가며 마주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디에 떨어질지도 모른 채로 이루어져 버린 과거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뜻이다. 칼의 작고 조용한 이주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글은 24.03.25.에 작성되었습니다.

www.instagram.com/joyjun7

이전 02화 로봇 드림 : 떨어져 있어도 늘 함께일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