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영화 <원더랜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 존재를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서비스다. 남겨진 이들은 이 기술을 통해 원래대로라면 떠나보냈어야 할 존재와의 시간을 조금 더 유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 과정에서 복원된 존재는 조금 더 완벽한 인물이 된다. 서비스와 관련한 당사자들의 선택에 의해 생의 결점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이상적인 면모들만 남겨둘 수도 있어서다. 이후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성향이 완성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원더랜드 속 인물은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기억나? 우리 같이 보러 갔던 거.”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장면 하나를 먼저 설명해야겠다. 원더랜드 속 우주에 펼쳐진 오로라를 보고 AI 태주(박보검 분)가 현실의 정인(배수지 분)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의 말을 통해 정인 역시 두 사람이 과거에 두 사람이 현실에서 함께 마주했던 오로라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속의 인물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고 현재의 감정을 공유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재하는 대상과 거의 다름이 없다. 단 하나,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만 빼면.
다음의 장면을 통해 정인이 원더랜드 속의 태주의 뺨을 만지고 함께 어깨를 기대며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모습이 이어진다. 그것이 혼자만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이 들이닥치기 직전까지다. 그녀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조금도 바라보지 못하고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의 태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원더랜드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결핍이 반드시 남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닿고자 하는 욕구다.
누군가와 접촉하는 행위는 확인에 대한 욕구에 가깝다. 자신의 곁에 있는 존재의 실존과 그와 주고받는 긍정적 관계와 감정의 교류에 대한 확인이다. 이에 대해 신태용 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이 영상 통화 너머에 존재하는 대상의 실존에 대한 의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경우에는 아내인 배우 탕웨이가 그 대상이었다. 결혼 후 한국과 베이징을 오가며 아내와 통화하던 중 영상 너머에 상대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영화 <원더랜드>는 존재를 확인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눈으로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지만 피부로 온전히 느낄 수 없는 너머의 당신을 어떤 방법으로든 느끼고 찾아내고자 하는 일.
작품 속에서 원더랜드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물은 세 가족이다. 남자친구 태주를 서비스로 구현해 낸 정인과 불치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지만 어린 딸인 지아가 자신을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서비스를 신청한 바이리(탕웨이 분). 그리고 오랜 망설임 끝에 먼저 세상을 떠난 손자 진구(탕준상 분)를 인공지능으로 되살려낸 할머니 정란(성병숙 분)이다. - 해리(정유미 분) 역시 자신의 부모님을 원더랜드 서비스를 통해 만나고 있고, 이는 서비스의 시작처럼 다뤄지고 있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분리하도록 한다. - 앞서 이야기했던 정인과 태주의 경우처럼, 당연하게도 나머지 두 가족 역시 서로를 만질 수 없는 상태다.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쪽은 정란과 진구다. 원더랜드 서비스를 통해 손자를 다시 만나게 된 정란은, 인공지능으로 구현된 손자를 향해 아낌없는 투자를 한다. 현실에서 다해주지 못해 남은 후회와 아쉬움을 지금이라도 채우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여 원더랜드 속 손자에게 보내는데, 이는 마치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몸부림처럼도 보인다. 현실 속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교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낮은 차원의 모습에 해당된다.
두 인물의 자리에 남는 것이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라면, 나머지 두 가족은 양방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부분은 있다. 세상을 떠난 바이리의 경우에는 다시 한번 ‘접촉’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 원더랜드 서비스가 필요 없어진 정인과 태주 커플에게는 상대를 접촉을 통해 확인할 수는 있으나, 과거와 달라진 인격에 대한 과제가 놓인다.
“진짜라고 믿었던 게 가짜가 되는 건 정말 한 순간이야.”
물리적인 존재적 확인이 가능해진 정인과 태주 사이에서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깨어난 태주의 인격을 과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현실의 태주가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 원더랜드 속의 태주에게 익숙해진 정인의 감각 역시 개입된다. 문제는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원더랜드 속 인물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완성되고, 큰 이상이 없는 한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사실. 그런 모습에 오래 노출된 정인이 기억하는 과거의 그는 진짜 태주가 맞는 걸까?
이야기의 또 다른 인물인 용식(최무성 분)의 장면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원더랜드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상은 자신의 죽음을 몰라야 하는 이유로 초기화된다. 긴 잠에서 깨어난 태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 자신을 원복하기 위한 환경이 필요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의식을 잃은 공백의 기간 동안에 정인은 일종의 상실을 경험했다. 원더랜드의 서비스에 의존했던 것은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으나 그 역시 과거의 자신과 같을 수는 없다. 감정적으로 의지하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공백의 경험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상실을 경험한 정인을 통해 상실을 경험한 적 없는 정인의 영향을 태주가 경험할 수 있을까?
양쪽에서 발생하는 이 두 가지 물음은 태주를 향해 너라는 사람은 원래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정인의 말을 그에게로 다시 되돌린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태주의 본모습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이제 더 이상 가닿을 수 없는 과거의 태주, 어떤 방법으로도 만져질 수 없는 원더랜드 안의 태주, 그리고 지금 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느껴지는 태주.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고 말이다. 모든 것은 원더랜드 시스템의 시작으로부터다. 순행하지 못하고 뒤틀려버린 사랑이다.
타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지점의 감정은 딸 지아를 위해 스스로 원더랜드로 향하고자 했던 바이리의 모습을 통해 그려진다. 이 선택으로 인해 지아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엄마(인공지능)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생전에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던 자신의 태도에 대한 죄책감도 담겨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욕구는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도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다. 시스템과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도 허상이 가진 유일한 허점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 속 바이리의 엄마인 화란이 원더랜드에서 처음 걸려온 인공지능 바이리의 전화 앞에서 짓는 표정이 이 영화의 가장 정확한 민낯에 가깝다. 환영으로 유지되는 감정과 시간의 유예 속에서 그녀만이 마땅히 잃어야 할 것을 내어주고자 한다. 이는 어쩌면 떠나보낸 인물 외에는 짊어져야 할 오늘과 내일이 없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전산망을 헤집고 시스템을 거스르면서까지 딸을 찾고자 하는 인공지능 바이리의 모성애 근간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이야기의 끝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의 고결한 감정까지도 원더랜드에서는 결핍의 자리에 놓인다.
세 이야기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제 역할을 해내며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실 가장 흥미로운 건 해리(정유미 분)와 현수(최우식 분)였다. 두 사람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원더랜드 내부의 인물과 감정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특히 해리의 경우에는 원더랜드 서비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부모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을 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경우 가운데 상실의 시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 사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먼저 떠나보낸 뒤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슬픔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영화가 스스로 찾은 해답을 숨겨놓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내내 이야기했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답, 충분한 시간을 통한 현실의 인정과 그 결핍을 받아들이는 일을 가만히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현수와 엄마(김성령 분)의 에피소드 역시 이 시스템의 가장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에 해당한다. 무엇이든 양면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원더랜드라는 서비스와 인공지능 시스템에도 역할과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감정에는 실체가 없다. 명확하지도 않다. 우리는 종종 이 순간의 감정을 믿는다고 여기지만,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은 그 감정이 향하는 실체 혹은 존재다. 그 대상을 다른 감각으로 느끼고 확인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감정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존재와의 이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과 기억은 되려 여기 남는다. 우리가 제일 먼저 잃게 되는 것은 외형에 대한 실상이며, 상실의 가장 처음 자리에 놓인다. 영화 <원더랜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에 조금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가 결국 이별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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