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26]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6년 3월 13일 자로 작성되었습니다. (기사로도 송고되었으나 제목은 다를 수 있습니다.)
01.“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대감을 우리 광천골로 오게 해야지.”강원도 영월 산골짜기에 위치한 광천골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는 청렴포를 유배지로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귀양 오는 고관대작 하나만 잘 모셔도 마을의 내일이 달라질 수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다. 양반이 머무는 동안 주어질 쌀밥과 같은 물질적인 부분은 물론,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에 복권(復權)되기라도 한 뒤에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입신양명의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고 한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다음 유배 대상을 유치한 촌장의 앞에 나타난 것은 복권은커녕, 곧 사형에 처해질 것이 분명한 세력 다툼의 피해자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다. 보수주인으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하는 흥도는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노산군과 그런 그를 완벽히 제거하려는 한명회(유지태 분) 사이에서 선택을 종용당한다.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역사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으로 인해 강제로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 왕위를 잃은 단종 이홍위의 이야기다. 그는 이후 일어난 단종 복위 운동의 여파로 폐위되고 노산군이라는 군호를 얻은 뒤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게 된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까지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장항준 감독은 여기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엄흥도라는 실존 인물을 엮는다. 세조에 의해 시해된 후 강물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을 홀로 수습했던 이다. 이야기가 단순히 폐위와 유배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쟁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닌, 단종의 곁에 머물렀던 이들과의 가슴 따뜻한 서사로 옮겨내기 위함이다.
02.서사를 온전히 단종의 것이 아닌 ‘왕과 사는 남자’(들)의 것으로 옮겨내기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행위는 ‘먹는 일’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히는 ‘함께 먹는 일’이다.(여기에서 남자는 성별을 뜻하는 명사가 아닌 대상을 통칭하는 대명사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타이틀이 의미하는 바는, ‘엄흥도’ 단일 인물이 맞다.) 극의 중반부에서 노산군과 흥도가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계기가 밥상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먹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임을 서브 텍스트 속에서부터 인정하고 있다. 같은 밥상을 마주하는 일이 신분 질서를 잠시 유예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제도가 갈라놓은 시대적 차별마저 지워낼 수 있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첫 시작부터가 그렇다. 흥도가 촌장으로 있는 광천골은 물론, 이웃인 노루골 촌장(안재홍 분)조차 자신의 마을에 유배지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함이다. 평생 따뜻한 쌀밥 한 그릇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극 중 밥상은 단순한 한 끼 식사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자신의 밥상을 최대한으로 준비해 유배인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온기로 치환되어 스크린 안팎으로 전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상왕(上王)과 평민(平民)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수단이자, 얼어붙은 노산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낼 수 있는 매개가 된다.한편, 식음을 전폐하는 노산군에게 ‘먹는 일’은 완전히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광천골 사람들에게 먹는 일과 삶이 맞닿아 있다면, 단종에게는 더 이상 먹지 않는 일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 식음을 전폐했던 초반부와 예정된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후반부가 그렇다. 역사적으로 아직까지 단종의 죽음이 자살과 타살 등의 여러 가능성을 두고 해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흥도에게 특정 행위를 직접 맡기는 까닭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남는 일. 마을을 지켜내고 내일 다시 한 그릇의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일. 죽음이 기약된 단종에게는 그저 마을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잠시 같은 의미가 될 뿐이다. ‘함께 살아가는 일’의 상징성을 지닌 행위적 의미로 말이다.
03.
“노산과 통하는 자는 모두 죽어야만 한다.”초반부에 제시되는 세 번의 언급을 주목하고 싶다. 귀양 오는 양반 하나만 잘 모시면 마을이 모두 잘살게 된다는 소문이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유배지로 선정되면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흥도의 제안에 도움을 주는 양반 따위는 본 일이 없다고 반박하던 이의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월로 유배 간 노산군이 달포,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장담하는 한명회의 말이다. 이 세 가지 말은 직접적으로 내세워지지 않지만, 극의 구조를 지탱하는 요소를 안고 있기에 중요하다. 첫 번째 말은 극의 동력이 되고, 두 번째 말은 시대상이자 이후 맥락에 대한 복선이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말은 시간적 제약이 되는데, 이렇게 두고 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세 가지 말을 배반(背反)하기 위한 이야기처럼 여겨진다.당연히 처음과 두 번째 말은 극 중에서 자연스럽게, 또 결과적으로 맞지 않는다. 유배지를 자청했으나 마을이 멸족을 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흥도와 광천골. 처음 흥도가 기대했던 것처럼 양반 한 사람을 잘 모신다고 해서 마을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유배지를 들였다는 이유로 얻는 것은 풍요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과 불안이며, 마을은 한때 품었던 기대를 접은 채 살아남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말이 완전히 옳았다고 할 수도 없다. 도움을 주는 양반 따위는 없다는 냉소와 달리, 노산군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두고 간 물건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오히려 가장 먼저 광천골의 형편을 살피는 인물이어서다. 권력을 쥔 양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폐위된 왕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영화는 처음 제시되었던 두 개의 말을 동시에 뒤집는다. 여기에 세 번째 말 또한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는다. 한명회가 장담했던 것처럼 노산군의 죽음이 예정된 운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영화는 그에게 허락된 시간을 단순히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기간으로만 두지 않는다. 달포 남짓한 시간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노산군은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의 삶에 스며들며, 결국 처음 귀양길에 올랐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이처럼 영화가 처음에 자신이 동력으로 삼았던 자리를, 시대상이자 이후 맥락에 대해 깔아두었던 복선을, 심지어는 예정된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시간적 의미를 배반하고자 노력해야만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이유로 보인다.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인물들의 진심을 꺼내 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 그리고 영화 속에서 허용된 잠깐의 시간 동안만이라도 예정된 죽음을 안고 있는 인물을 잠시나마 또렷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04.“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한명회의 계략에 의해 저지되기는 하나, 노산군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주어지는 신은 두 개다. 전에 없던 기개를 보이며 화살 한 발로 호랑이의 격습으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지켜내는 장면이 하나. 촌장의 아들인 태산(김민 분)이 유배지에 함부로 드나들었다는 죄목으로 관아에 끌려가 태형을 당하는 순간 한명회와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또 하나. 지금 언급한 두 개의 신은 단단히 박힌 두 개의 기둥처럼 서서 노산군 성장 서사의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다. 그 안에서 변화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은 물론 촌장인 흥도와 마을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인물이 마음을 고쳐먹고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된다는 것만으로 성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백성과 진심을 주고받고, 심지어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내보이는 모든 과정이 단종에게는 궁궐 안에서는 만나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관계는 조정에서 말하는 ‘충(忠)’에 이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누군가를 위해 다시 살고자 했던 마음을 스스로 내려놓는 결정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때의 죽음은 분명 처음 귀양길에 오르던 때의 노산군 마음속의 죽음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된다.
05.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장항준 감독의 연출력이다. 지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 영화 <오픈 더 도어>의 글을 통해 해당 작품이 ‘장항준 감독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날이 서 있는지 확연히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작품의 흥행 정도와 무관하게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후 보여준 행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리바운드>(2023), <더 킬러스>(2024), 그리고 오늘 이 작품 <왕과 사는 남자>(2026)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흔들림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평준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 장르적 다양성을 마주하기 힘든 최근 영화 시장에서 특히 더 돋보일 수밖에 없는 재능이자 공력이라 할 것이다.이제 1,200만 스코어가 넘었다. 좋은 영화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성적을 받아 들 수 있게 될지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매년 스크린에 걸 한국 영화가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고, 작년보다는 올해 더, 올해보다는 내년에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몇 해 전부터는 업계 최고 대목 가운데 하나인 명절 연휴에도 대표적인 한국 영화를 손꼽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웃음과 감동은 물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지, 또 누군가의 곁에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담아낸 것이 유효한 게 아니었을까. 역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토록 따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