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조각 위에 세워진 미래 -
나는 국내 반도체 연구소 기업체에 입사했다.
그리고 줄곧 식각(Etch)을 해왔다.
식각은 말 그대로 깎아 남기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회로를 위해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워내는 조각.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쓰는 모든 기기의 핵심은
이 ‘보이지 않는 조각’ 위에 서 있다.
아이에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주 작고 복잡한 도시를 짓는 일 중 필요한 일
길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세우고, 건물을 올린다.
다만 이 도시는 피자 한판 크기의 작은 땅(300mm 웨이퍼) 위에 세워지고,
층간 높이는 머리카락 굵기(μm 단위) 수준이다.
식각 엔지니어는 그 위에서
건물을 깎고 다듬는 정밀 조각사다.
요즘 세상은 AI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AI가 두뇌라면,
HBM은 그 두뇌를 이루는 뇌세포(Neuron) 다.
예전의 DRAM은 납작한 단층집이었다면,
HBM은 그 집들을 층층이 쌓아 올린 큐빅형 고층 빌딩에 가깝다.
층과 층이 가까워지고,
오갈 수 있는 길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
데이터는 훨씬 빠르게 흐른다.
AI가 ‘생각’을 더 잘하게 되는 이유다.
HBM의 TSV(Through-Silicon Via)
말 그대로 실리콘을 수직으로 뚫는 통로다.
도시로 치면 엘리베이터와 같다.
엘리베이터가 많고 막히지 않으면,
사람(데이터)은 빠르게 오르내린다.
이 통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식각은 더욱 정밀해진다.
벽이 들뜨지 않게, 바닥이 거칠지 않게,
머리카락보다 얇은 두께(μm)를 균일하게 유지해야 한다.
웨이퍼 한 장 위에는
수백 개의 칩이 동시에 지어진다.
이제 그걸 조각내야 한다.
이 과정을 다이싱(Dicing)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피자를 조각내듯 나눈다.
각 조각은 모양은 같지만,
서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칼 대신 레이저와 플라즈마를 쓴다.
레이저는 빛의 열로 재료를 녹이고,
플라즈마는 가스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칼날로 자른다.
조각면이 매끈할수록,
기판에 붙을 때 균열이나 파티클이 줄어든다.
이 정교한 ‘피자 조각 내기’가 끝나야
비로소 AI 서버 속의 개별 두뇌에 필요한
작은 단위의 접합용 셀이 완성된다.
HBM은 여러 개의 메모리 칩을 한 층씩 쌓아서
정확히 맞추고 단단히 붙이는 기술의 결정체다.
한 층이라도 삐뚤어지면,
마치 블록 탑이 기울듯이 신호가 불안정해진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장은 늘 정렬(Alignment) 과의 싸움이다.
이 과정이 바로 후공정(Advanced Packaging)의 핵심이다.
칩을 쌓고, 붙이고, 열과 압력을 제어하며
플라즈마로 표면을 다듬는다.
엔지니어의 일은 결국,
보이지 않는 오차를 보이는 질서로 바꾸는 일이다.
이렇게 길을 만들고, 조각을 내고, 메모리 탑을 쌓고
서로 신경망처럼 연결을 하면
AI는 스스로 더 똑똑해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제는 학습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한다.
처음엔 단순한 계산기 같던 존재가,
이젠 사람의 말에 반응하고, 감정을 흉내 낸다.
솔직히 말해, 그게 조금 무섭다.
우리는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작동하는 뇌 구조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인터넷 혁명보다 훨씬 빠르게,
AI의 파고가 우리의 시간을 앞질러 온다.
엔지니어의 하루는 대단하지 않다.
패턴을 깎고, 거칠기를 줄이고,
오차를 다독인다.
하지만 그 작은 손놀림이
AI라는 새로운 생명체의 신경망을 만든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깎으며
미래의 형태를 조금씩 다듬는다.
모두가 AI를 말할 때,
내 눈에는 여전히 HBM이 먼저 보인다.
“그 빛나는 탑과 엘리베이터,
그리고 끝없이 흐르는 데이터의 사람들.”
— JP 정표 | Etch the Life. 빛과 공정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