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독한 테스트 키친으로
"자, 이제 첫 번째 접시를 비우러 가보실까요?"
수줍게 주방 문을 열어드렸던 게 11월이었습니다.
그 뒤로 18개의 접시를 차렸습니다.
웨이퍼를 반죽에, 식각을 칼질에, 증착을 크림 올리기에 빗대며
낯선 주방에 여러분을 초대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불안했습니다.
반도체 엔지니어가 차린 밥상을 과연 누가 앉아서 먹어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앉아주셨습니다.
"빈틈이 있어야 통한다는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반도체가 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 주셨네요."
"초코칩, 치즈,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비유로 이해가 쏙쏙 '통'합니다."
"NPN 트랜지스터 공부할 때 머리 아프게 외웠는데… 이게 이렇게 풀이가 되는군요!"
이런 한 줄 한 줄이,
저한테는 셰프가 홀에서 들리는 "맛있다" 한마디를 듣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의 응원에 힘입어,
이 작은 주방에서 보내주신 라이킷과 댓글 덕분에
태평양 건너편에서 열렸습니다.
19개의 접시로 시작한 이 코스가
31개로 늘어났습니다.
그것도 양식으로요.
"The Semiconductor Kitchen: Life Recipes from the Chip Fab"
파일로만 존재하던 문장들이
종이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걸 보았을 때,
아, 이 주방이 헛불은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접시가 비워졌으니,
저는 잠시 앞치마를 벗고
본래 자리인 연구소—고독한 테스트 키친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분들이 반도체 공장을 떠올리면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거대한 팹을 먼저 생각하겠지요.
그곳이 매일 수천 명의 주문을 처리하는 전쟁 같은 홀이라면,
제가 머무는 곳은 아직 세상에 없는 맛을 찾기 위해
조용히 불을 지키는 실험실입니다.
이곳에는 정해진 레시피가 없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큰 단계들은 있어도,
어떤 배합이 '차세대의 맛'이 될지는
아무도 쉽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실패를 맛보고,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쓴잔을 들이켜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막막한 어둠 속에서 기어이 조건을 찾아내
누군가의 내일로 넘어갈 레시피를 완성해 내지요.
그 레시피가 양산이라는 더 거친 주방에서도
흔들림 없이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쩐지 자식을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는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이 글을 닫고 나면,
당신도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겠지요.
각자의 주방으로. 각자의 삶으로.
그곳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식각'의 순간을 만나거나,
티도 안 나게 쌓아야 하는 '증착'의 시간을 견뎌야 할 때,
문득 이 반도체 키친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반도체라는 차가운 칩 속에도
뜨거운 사람의 이야기가 흐르듯,
당신의 하루하루도 의미 없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조용히 완성되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손님들이 떠난 뒤에도
주방의 불은 계속 켜져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다음 레시피를 준비하러
다시 팬 앞에 서겠습니다.
아, 참.
시즌2는 언제 나오냐고 물어봐 주신 분들이 계셨지요.
아직 머릿속에 메모만 있는 상태인데,
다음 메뉴의 이름은 아마 —
'반도체 사춘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문을 열겠습니다.
부디 당신의 식탁에도
늘 따뜻한 온기와 맛있는 인생이 함께하기를.
— 반도체 키친의 셰프이자 연구원, JP 정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