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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서우 Jun 12. 2019

봄을 기다리는 족은노꼬메오름

[진서우의 제주 감성 여행기] ⑧

    


유채꽃이 노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사월이다.

지금쯤 숲은 연둣빛 세상으로 변했을 테지. 그런 생각으로 족은노꼬메오름에  갔다. 그러나 오름에는 봄이 더디게 오고 있었다. 겨울을 떨쳐내지 못한 숲은 이제야 깨어나고 있었다.   




장과 나는 짧은 길도 긴 시간을 들여 걷는다. 숲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몸속으로 밀려드는 공기도 상큼한 초록이다. 숲에 들 때면 내가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흙냄새와 상산나무 향기에  코가 벌름대고, 발에 밟혀  사그락 대는  화산송이와  삼나무 숲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에 귀가 즐겁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숲에 마음을 디밀어 보고,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숲에 스며든다.



    


족은노꼬메오름은 섬의 서북쪽인 애월읍에 있다. 주차장이 따로 있지만, 궷물오름도 함께 올라갈 생각이어서 궷물오름 주차장에 차를 댔다. 탐방로에는 화장실이 없으므로 주차장에 있는 간이 화장실을 미리 이용해야 한다. 뾰족하고 높아 보이는 오름이  큰노꼬메오름이고, 그 옆에 완만해 보이는 오름이  족은노꼬메오름이다. 햇살이 잘 드는 소나무 길을 잠시 걸어가자  족은노꼬메오름과  궷물오름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방향으로 오름 정상에 오르고 오른쪽으로 내려와 궷물오름에 가려고 길을 잡았다. 숲에 들자 넓은 길이 나오고, 꽤나 힘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평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나는 조금 후의 일을 모른 채 가볍게 걸었다.   





숲을 걷다가 대화에 빠져 숲에 한눈을 팔 때가 있다. 꼬불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으면 '길이란 무엇인가', 높은 오름을 개미 행렬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오른다는 건 무엇인가', 무덤을 보면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울창한 숲을 보면 '숲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나는 대로 툭툭 대답을 한다. 어떤 대답은 감탄을 하고 어떤 대답은 서로 구박을 한다.      





오늘도 촌장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유수암 목장이 나왔다. 그때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족은노꼬메오름은  갈림길이 엄청 많은데 안내 표지판은 부족하다. 오름을 왔으니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는데, 내리막의 유혹에 길을 잃은 거였다. 한참을 되돌아와서 오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족은노꼬메오름은  평범한 오름이 아니다. 초입만 평지이고 올라가기 시작하면 경사가 꽤 험하다. 엉뚱한 길로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 킬로미터쯤  올라가자 경사가 더욱 가팔라졌다. 땀이 나고 숨도 차올랐다. 그때마다 멈춰 서서 돌아보면 제주 들녘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노루 녀석들은 모두 어디 간 거야? 가끔 뱀도 몇 마리 기어 다니면 좋을 텐데…."

촌장이 숲을 올라가면서 투덜댔다. 나는 발 없는 짐승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있다. 무심히 걷는 사이에 발밑에 있는 뱀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비명을 질러댈 것이고, 필경은 펄쩍 뛰어올랐다가 땅으로 쿵 떨어질 것이다. 뱀이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활엽수들이 잎을 떨군 채 서 있고, 그 밑 세상은 조릿대들이 장악하고 있다. 나는 항상 겨울의 숲을 걸을 때면 봄의 숲을 생각한다. 봄이 되면 활엽수의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일시에 깨어나는 연둣빛 새싹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겨울의 흙길에서 봄의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다.


         



드디어 오름 정상이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뿌옇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1시간 정도 걸렸을 텐데, 우리는 2시간이 지나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모든 오름 정상에는 경이로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한라산의 백록담이 보이고, 푸른 바다와 마을들이 섬의 치맛자락으로 아득히 흔들리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오소리 서식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허물어진 듯한 저 굴이 오소리 굴이다. 입구의 흙이 촉촉한 걸 보니 조금 전까지도 오소리가 드나든 게 분명했다. 오소리는 비탈지고 배수가 잘 되는 곳에 굴을 판다. 중심 굴 주변에 작은 굴들을 그물 모양으로 파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산다. 동면을 위한 겨울 굴과 번식을 위한 여름 굴을 구별해서 파고, 굴 청소도 자주 한다고 한다. 나보다 청결한 녀석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오니 주변은 어느덧 활엽수의 길이 끝나고 삼나무 숲이  시작되었다. 나무들은 훌쩍 커지고 밑동은 굵어졌다. 삼나무가 빽빽한 곳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나무 사이를 걸으니 멋진 병사의 호위를 받는 듯 기분이 좋았다.





숲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삼나무가 여기저기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다. 제 생을 다 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나무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삼나무에게 영혼이 있다면 온 몸이 뽑히는 순간에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고 싶다. 거친 바람에 무심한 상태로 쓰러졌을까? 그 죽음에는 미련도 고통도 없었을까? 쓰러지는 순간까지 물을 빨아들이고 광합성으로 초록 잎을 부양하고 있었을 것은 자명하다.


나무들이 죽었다는 건 사람의 관점일 뿐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저 나무들은 온몸으로 우뚝 서서 한 생을 살았고, 시간이 되어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제 저들은 숲에 누워서 이끼와 버섯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미에게 안락한 집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게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른 모습으로 숲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숲에는 낡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없다. 숲의 모든 것이 생명의 순환이 아닐까?          





오름을 다 내려오면 족은노꼬메오름과 궷물오름 사이에 겨울에도 싱싱한 풀이 자라는 넓은 초지가 있다. 지금도 노루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풀을 뜯고 있다. 노루의 저 눈빛은 마치 뒤편에 있는 나를 보는 듯하다. 내가 움직이자 풀을 뜯던 일을 멈추고 정지해 있다. 카메라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수풀에서 꿩 한 마리가 요란스럽게 울어 재끼며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나보다 더 놀란 노루가 숲으로 숨어버렸다.    

  




이곳 초지는 <효리네 민박> 프로그램에서 이효리와 아이유가 촬영을 했던 곳이다. 유명세를 탄 덕분일까? 올라오는 젊은 남녀마다 내려가는 내게 촬영 장소를 물었다. 삼나무와 전나무숲에 둘러싸인 초지에는 깔깔대며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보였고, 셀프 웨딩촬영을 하는 신부의 모습이 눈부셨다. 멋지게 차려입은 청춘들이 인생의 한 순간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초지를 지나서 궷물오름에 올랐다. 높이 57미터의 낮은 오름이다. 분화구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이 샘물을 궷물(괸물)이라고  부르는 대서 유래됐다. 궷물오름 정상에 서자  큰노꼬메오름이  무시무시한 자태로 솟구쳐 있다. 주차장에는 차량이 많지만  족은노꼬메오름  정상을 밟는 여행객이 별로 없었다. 오름이 험한 탓도 있을 거다. 하지만 험한 만큼 숲이 깊고 오르는 즐거움이 있다.


[여행 팁]

•경사가 꽤 가파른 오름이므로 트레킹화를 신고 올라가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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