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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서우 May 25. 2019

바굼지오름에서 제주를 품다

진서우의 제주 감성 여행기 ⑥

산과 바다와 마을을 품은 환상적인 전망

박쥐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는 오름

목가적인 시골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

오름 아래 추사 김정희가 가르쳤던 대정향교가 있어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5월 중순입니다. 햇살은 강렬하지만 흰 들꽃이 유혹하는 바굼지오름에 촌장과 함께 오릅니다. 산방산과 일 킬로미터쯤 떨어져 마주 보고 있는 오름입니다. 지도에는 단산오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제주 사람들은 바굼지오름이라고 부른답니다. 단산보다 바굼지라는 이름이 맘에 듭니다. 이름의 유래에는 제주 방언으로 바구니라는 뜻의 '바구미'에서 왔다는 설과 박쥐라는 뜻의 '바굼지'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박쥐가 날개를 편 형상이어서 후자의 설이 더 수긍이 갑니다. 제주의 다른 오름들과는 생김새가 다르기에 전부터 꼭 한번 와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서귀포 안덕면에 위치한 바굼지오름은 해발고도가 158미터이고 오름의 높이는 113미터입니다. 산책로가 1킬로미터쯤 되어 한두 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오르내릴 것 같습니다. 주차장에 차들이 없는 걸 보니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오름인가 봅니다. 바굼지오름에서는 어떤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하며 천천히 오름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름의 시작 부분은 완만한 오솔길입니다. 타이어매트가 깔린 산책로는 허술하고 나무 의자는 오래되어 칠이 벗겨져 있습니다. 좁은 오솔길에는 흰 들꽃들이 여행자의 옷자락을 살며시 만지작거립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경쾌하게 몸을 흔들며 수다스럽습니다.

 "당신 좋아하는 흰 꽃이 많네."

나는 흰 꽃을 좋아합니다. 빨간 꽃, 노란 꽃처럼 강렬한 보다 흰 꽃이나 연한 의 꽃을 좋아합니다. 무리 지어 소곤거리는 흰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어서 스무 살 즈음의 처녀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진지동굴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가 나옵니다. 바굼지오름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이 여기저기 있니다. 가파른 목재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막다른 길이므로 동굴 입구에서 돌아 나와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캄캄한 안쪽을 살펴봅니다. 나도 뒤따라가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살펴보니 동굴은 깊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나의 뇌가 동굴 천장과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흐릿하게 인지합니다. 너무 놀라 셔터를 누르면서 돌아섰더니 사진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뒤따라 나온 남편이 꼽등이 천지라고 합니다. 팔에 난 털이 곤두섭니다.     


 

         

      

완만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지고, 들꽃에 파묻힌 의자들이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투박한 나무의자와 생생하게 피어있는 흰 꽃이 잘 어울립니다. 망가진 평상 사이로 흰 꽃이 머리를 삐죽이 내밀어 속수무책 내 마음속으로 파고듭니다. 집이 가깝다면 한 움큼 꺾어다가 거실 창가 꽃병에 꽂아놓고 싶습니다. 들꽃에 묻어온 바람의 감촉과 햇살의 향기에 거실이 환해지겠지요.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집니다. 정상이 얼마 안 남았나 봅니다.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오름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동네가 눈에 들어옵니다. 넓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처럼 작게 보입니다. 저렇게 넓은데 일하는 농부는 서너 사람이라 내가 괜스레 걱정이 됩니다. 햇살을 피해 바위 그늘에 숨은 초록이가 앙증맞은 얼굴을 빼꼼히 들키고 연한 줄기 덩굴은 나무를 기어오릅니다.





바굼지오름 정상에 오릅니다.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현기증이 납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근사합니다. 산방산은 허공으로 시원하게 솟아있고, 마을은 평화로워 보입니다. 박쥐가 날개를 편 형상의 바굼지오름. 이곳 날개(정상)에서 다른 쪽 날개로 건너갑니다.       

       


 


오름의 북사면은 바위들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바위산이라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름의 나무들은 키가 작아 그늘을 만들지 못합니다. 더운 날에는 힘든 산행이 될 듯합니다. 염소나 다닐 것 같은 좁고 험한 길들이 이어집니다. 다른 쪽 봉우리에 오르는 건 포기합니다. 수직의 절벽에 자생하는 식물이 신기한 모습입니다. 낯가림을 하는 걸까요? 버섯 같기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식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확인하지 못하고 내려옵니다.     





산방산 뒤로 한라산의 형태가 흐릿합니다. 저 아래 대정향교가 보입니다. 향교 마당의 푸른 잔디가 멀리서도 단정해 보입니다. 오름을 내려와 시골길을 걷습니다. 초여름 같은 날씨인 데다 바람도 불지 않아서 걷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집을 나서면 일상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제주살이가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습니다. 자연 속을 걷는 우리가 행복한 만큼 자연도 행복할 수 있게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      

    




오름 아래에 있는 대정향교입니다. 지붕 위로 보이는 암반의 모습이 떡시루처럼 재미있습니다. 대정향교의 역사를 말해주듯 나무의 수령이 오래되어 보입니다. 이곳에서 유배생활 중이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학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추사가 걸었던 유배길은 세 개의 코스가 있는데, 대정향교에서 시작되는 3코스는 안덕계곡에서 끝이 납니다. 머나먼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 추사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게 했을지 궁금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지나고 보면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성숙시키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행복한 삶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기회가 된다면 추사 유배길을 따라 여행을 해보리라 마음먹어 봅니다.


차를 주차시켜놓은 곳까지 오름을 돌아서 꽤나 걸어가야 될 것 같아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걸어갑니다. 마을의 길모퉁이를 돌 때 촌장이 말합니다.

 "시원한 막걸리 파는 주막집이 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맞장구칩니다. 하지만 주막집 대신 차를 주차시켜 놓은 주차장이 나옵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신이 납니다. 전망이 좋은 바굼지오름을 뒤로하고 떠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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