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그립니다
시내버스 승강장
할머니가 동네 골목에서 실버카를 밀고 걸어간다. 오늘도 햇볕 받으며 마실을 나선 것이리라. 아마도 왼쪽으로 돌면 목적지일 것이다. 그곳이 내가 가는 시내버스 승강장이다. 가끔 골목길에서 만나는 실버카 주인은 그 버스승강장에 한참씩 앉아 세상을 읽는다.
걸음을 늦춰 뒤따르던 나도 버스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할머니 곁에 앉는다. 바삐 달려와 멈춘 시내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승강장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분주히 흩어진다. 쓸쓸함이 감도는 승강장에서 의자는 점점 따끈해지면서 몸에 온기를 전한다. 할머니는 옆에 앉는 사람이 반가운지 어디 가냐며 말을 건다. 짧게 대답을 하고 어디 가시는지 여쭈니 그냥 앉아 계신단다. 승강장 의자가 따끈따끈해서 앉아 있을 만하기도 하지만 앉아서 지나가는 차, 사람 구경하는 것도 심심풀이가 된다는 것이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 시내버스 승강장이다. 차를 타고 내리는 남녀노소를 바라보면서 젊은 날도 떠올리고 불현듯 생각나는 친구와의 추억도 그려보고 있을는지 모른다. 얼마 전 역전 승강장에서 옆집 아주머니를 뵌 적이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반가워 어디 가시냐고 물으니 친구를 만나서 주변을 구경하다가 쉬고 있다고 했다.
시내버스 승강장이 도심 속의 길쌈 방 역할을 하는구나 싶었다. 예전에 동네 아낙들은 길쌈 방에 모여 모시도 삼고 물레질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이웃과 소통했다. 이제는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 모여서 정을 나누며 산다. 갑자기 덮친 감염병으로 노인들이 소일할 장소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버스승강장이 어르신들께서 바깥에 나와 만나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가 된 모양이다.
요즘 우리 동네 시내버스승강장이 멋지게 변하고 있다. 교통약자들이 이용하는 이곳이 새로운 변신을 할 때마다 반갑기 그지없다. 미니도서관을 갖춘 곳, 주변의 특성이나 역사성을 고려하여 전시물을 설치하는 곳, 등 다양한 정보와 편리를 제공한다. 버스 도착시각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생겼을 때는 참 신기했다. 곧 버스가 나타날 것 같아 고개를 내민 채 눈을 떼지 못했는데 말이다. 전광판이 생기고는 도착시간을 확인한 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주변에서 일처리도 한다. 그 후 달라진 것이 의자이다. 흰 방석을 깐 듯 깔끔한 탄소섬유로 된 발열의자가 설치되었다. 이 긴 의자는 매력덩어리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의자가 제 몫을 단단히 한다. 걸터앉으면 금세 아랫목처럼 따끈따끈해지니 지나가다 쉬어가기 딱 좋은 공간이다. 옆에 앉은 할머니처럼 외로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도 온기 덕분이다. 지난해까지 몇 년은 투명 비닐로 천막을 쳐서 바람까지 막아주어 아늑하기까지 했다. 올해는 코로나 전파의 빌미가 될까 싶어 보온용 천막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시내버스 승강장은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지인이 차를 몰고 우리 동네 승강장 앞을 지나간다기에 만나기로 해, 승강장에 나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법 부피가 큰 약봉지를 들고 오신 아주머니가 내 옆에 앉으셨다. 약봉지가 두툼해서 무슨 약을 드시는지 물었다. 해소 약이라 하셨다. 그러고는 승강장 건너편에 있는 병원을 가리키며, 사는 곳은 제법 먼데 치료효과가 좋아서 일부러 온다며 힘주어 병원 자랑을 하셨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내가 찾는 병원이구나 싶어 반가웠다.
그 며칠 전 우리 집에 오신 친정어머니께서 식사 중에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일순간 숨이 막히는지 안색이 변하셨다. 이마부터 점점 내려가며 잿빛으로 변해가는 얼굴을 지켜보던 우리는 위급함을 느끼고 어머니를 업고 뛰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호흡이 트이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며칠 어머니의 잦은 기침을 치료할 병원을 찾으려 고민 중이었다. 전날 고향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연락하여 다시 오시게 했다. 어머니께서도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로 효과가 좋아서 기침이 많이 줄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침을 하며 사셔서 당연한 듯 봐 넘기던 어머니의 기침을 잦아들게 한 것은 승강장에서 만난 그 아주머니의 정보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마음 안에 가득하다.
5분 뒤에 도착된다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와 말벗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할머니의 휴대폰이 힘차게 울린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운동 중이라고 말씀하신다. 멀리 사는 자식이 걱정할까 봐 둘러대는 모습이 우리 어머니와 닮았다. 할머니 입가의 미소가 이마 주름까지 엷게 편다.
신호등 건너 오르막길에 내가 탈 시내버스가 나타났다. 온기 가득한 의자에 또 다른 할머니의 말벗이 앉기를 바라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옆 은행나무가 떨군 노란 잎이 승강장 앞에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