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결국은 암기”라는 말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시험은 기억을 묻습니다. 진단 기준도, 약물 용량도, 수치도 결국은 외워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오래 남지 않는 타입입니다.
단기 기억에 억지로 밀어 넣을 수는 있어도, 시험이 끝나면 같이 사라집니다.
제게 암기는 이해 위에 올라가는 마지막 단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 때 먼저 묻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병태생리든, 약물 기전이든, 진단 알고리즘이든 논리적 흐름이 보이면 기억은 훨씬 덜 힘들어집니다. 개별 사실이 아니라, 구조 안에 배치된 정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흩어진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이고, 그 선이 만들어지면 암기는 부가적인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공부가 느려집니다. 의학에는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암기할 것과 이해할 것을 구분하려 합니다.
이해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 왜 이 약이 이 질환에 쓰이는지
- 왜 이 검사 수치가 이렇게 변하는지
즉, 인과와 구조가 있는 영역입니다.
반대로 암기할 것은 대체로 이런 것들입니다.
- 수치와 기준
- 예외 조항
- 분류표의 세부 항목
구조를 이해한 뒤에도 남는, 규칙의 표면에 해당하는 부분들입니다.
이 구분이 생기고 나서부터 공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해해야 할 부분에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암기해야 할 부분에서는 과감히 도구를 사용합니다.
Anki 같은 반복 시스템은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이해 위에 얹힌 사실은 반복만으로도 단단해집니다.
저는 암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암기가 공부의 시작이 아니라, 구조를 세운 뒤에 올라가는 마감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브런치에서는 이런 기준들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무엇을 외울지보다, 무엇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에게 공부는 정보 수집이 아니라, 구조를 세우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 기준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실습을 돌면서 처음 체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