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는 처음이라: S사 적응기
"BL이 뭔가요? 적하목록은요? 컨테이너 FCL과 LCL의 차이는요?"
2024년 7월, S사 입사 첫날. 온보딩 세션에서 쏟아지는 물류 용어들에 머리가 하얘졌다.
2년간 뷰티 CRM PM으로 일하며 '예약', '고객 관리', '재방문율' 같은 단어에 익숙해졌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이 도전이 설레기도 했다.
T사에서 4개월간 경험했던 물류의 복잡성과 비효율성.
그때 느꼈던 "이걸 디지털로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워딩(Forwarding)은 화주(수출입을 하는 기업)를 대신해서 화물 운송을 주선하는 서비스다.
쉽게 말하면 화주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제품 1000개를 보내야 해요"라고 하면, 포워더가 "선박 예약, 통관, 운송까지 다 해드릴게요"라고 답하는 비즈니스다.
단순해 보이지만, 각 단계마다 수십 개의 서류와 시스템이 관여한다.
입사 첫 주, 실제 포워딩 프로세스를 관찰하며 충격을 받았다.
서류 지옥
하나의 컨테이너를 보내는 데 필요한 서류가 평균 20-30개였다. CI(Commercial Invoice), PL(Packing List), BL(Bill of Lading), 원산지증명서, 검역증명서...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 이메일과 팩스로 주고받고 있었다. 2024년에 여전히 팩스를 사용하고 있다니.
정보의 블랙홀
화주가 "내 화물 지금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으면, 포워더는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라고 답한다. 확인하는 데만 30분이 걸린다. 실시간 추적이 불가능한 것이다.
수작업 프로세스
견적 계산은 엑셀로 수작업, 선박 스케줄 확인은 선사 홈페이지를 일일이 방문, 서류 작성은 워드와 엑셀에 타이핑. T사에서 봤던 그 비효율성이 여기에도 그대로 있었다.
S사의 미션은 명확했다. "수출입 과정의 모든 것을 디지털로" 만드는 것.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방향이 있었다. 첫째는 자동화다. AI로 서류를 자동 파싱하고, 통관 신고를 자동화하며, BL을 자동으로 발행한다. 둘째는 투명성이다. 실시간으로 화물 위치를 추적하고, 각 단계별 진행 상황을 가시화하며, 비용 명세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셋째는 효율성이다. 원클릭으로 견적을 요청하고,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제공하며, 통합 관리 대시보드로 모든 걸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K사에서 뷰티샵의 예약과 고객 관리를 디지털화했다면, S사는 수출입 물류를 디지털화하는 것이었다.
2022년 T사에서 4개월간 일하며 느꼈던 것들이 떠올랐다. H사 이집트 플랜트 프로젝트 입찰 당시 영어로 된 A4 200페이지짜리 서류를 봤고, 원자재 조달부터 최종 납품까지 추적이 불가능했으며, 수십 개 협력업체와 엑셀과 이메일로만 소통했다.
그때 생각했다. "이런 비효율을 디지털로 바꿀 수 있다면 엄청난 가치를 만들 수 있겠다"
그때의 생각이 2년 후 현실이 되었다.
입사 2주차,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수출입의 전체 흐름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각 단계가 다시 수십 개의 세부 프로세스로 나뉜다.
입사 첫날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BL이었다.
BL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화물 운송 계약서로서 선사와 화주 간의 계약이다. 둘째는 화물 영수증으로서 선사가 화물을 받았다는 증명이다. 셋째는 소유권 증서로서 BL을 가진 사람이 화물의 주인이다.
수입국에서 화물을 찾으려면 BL 원본(Original)이 필요하다. BL 없이는 세관에서 화물을 못 꺼낸다. 이게 수출입에서 BL이 가장 중요한 서류인 이유다.
S사에서 내가 기획한 첫 번째 기능이 바로 "BL 자동 발행"이었다. 이 복잡한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것.
통관은 화물이 국경을 넘을 때 세관의 허가를 받는 과정이다.
각국마다 규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HS Code라는 상품 분류 코드를 확인해야 하고, 그에 따라 관세율을 계산해야 한다.
검역 대상 여부를 판단하고, 원산지를 증명해야 하며, 식품이나 화장품, 의약품 같은 경우 각종 특수 서류가 필요하다.
T사에서 인도네시아 플랜트 프로젝트 할 때 경험했던 그 복잡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입사 첫 주 가장 헷갈렸던 용어였다.
FCL(Full Container Load)은 컨테이너 하나를 독점 사용하는 방식이다. 대량 화물에 적합하고, 비용은 높지만 빠르다.
LCL(Less than Container Load)은 컨테이너를 여러 화주가 공유하는 방식이다. 소량 화물에 적합하고, 비용은 낮지만 느리다.
S사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 실시간 화물 추적이었다.
선박에 실린 모든 화물의 목록이다. 세관에 신고해야 하는 필수 서류다.
하나의 선박에는 수백 개의 컨테이너가 실리고, 각 컨테이너마다 다른 화물이 들어있으며, 각 화물마다 품명, 수량, 가격, HS Code 등 다른 정보가 필요하다. 이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틀리면 통관이 지연된다.
내가 기획한 "적하목록 신고 자동화" 기능은 CI/PL 서류에서 AI로 정보를 추출하고, 자동으로 적하목록 양식에 매핑한 뒤, 오류를 검증하고 세관 시스템에 전송하는 것이었다. 기존 수기 입력 대비 실패율을 40%에서 10%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첫 주는 정말 지옥이었다. Day 1에는 BL, CI, PL, HS Code를 배웠고, Day 3에는 FCL, LCL, CBM, TEU를 알아야 했다. Day 5에는 Shipper, Consignee, Notify Party가 뭔지 배웠고, Day 7에는 FOB, CIF, DDU, DDP라는 또 다른 외계어를 마주했다. Day 10쯤 되니 포기하고 싶었다.
K사에서는 2년간 '예약', '고객', '매출' 같은 익숙한 단어로 일했다. 하지만 S사에서는 모든 게 외계어였다.
단순히 용어를 아는 것과 전체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예를 들어 BL은 언제 발행되는지, 적하목록은 누가 작성하는지, 통관 신고는 언제 하는지, 컨테이너 번호는 언제 확정되는지. 각 질문마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운 좋게도 팀 내에 20년 경력의 물류 전문가가 계셨다.
매주 금요일 오후, 1:1 세션을 가졌다. 내가 일주일간 모른 용어 리스트를 정리해가면, 그분이 실제 사례로 설명해주셨다. 이해 안 되는 프로세스를 질문하면 화이트보드에 그려가며 알려주셨다.
가장 도움된 조언
"물류를 이해하려면 '돈의 흐름'과 '서류의 흐름'을 따라가세요. 화물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이 말이 정말 핵심이었다.
전통 포워더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분석했다. 홈페이지를 탐색하고, 견적 요청 프로세스를 직접 체험해보고, 고객 후기를 분석했다.
해외 디지털 포워더들도 연구했다. Flexport(미국), Freightos(이스라엘), Shypple(네덜란드) 등을 살펴봤다.
성공한 디지털 포워더의 공통점은 투명성과 실시간성이었다. 차별화 포인트는 UX와 자동화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직 해결 안 된 문제로는 문서 자동화와 AI 활용이 남아있었다.
가장 효과적이었던 학습 방법이다.
입사 2개월차, 중국에서 샘플 제품을 소량 수입해봤다. 견적 요청부터 계약, 결제, 수출 통관 서류 준비, BL 수령, 수입 통관 대행, 최종 배송까지 전 과정을 경험했다.
실제로 해보니 이해가 됐다. 왜 화주들이 불안해하는지, 어떤 정보가 정말 필요한지,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자주 생기는지.
K사에서 뷰티샵 사장님들을 인터뷰했듯이, S사에서는 내가 직접 화주가 되어봤다.
입사 초에는 BL이 뭔지도 몰랐고, 수출입 프로세스를 전혀 몰랐으며, 화주의 페인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3개월 후에는 기본 물류 용어를 숙지했고, 수출입 프로세스의 전체 흐름을 이해했으며, 화주 관점에서 문제를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BL 자동 발행 기능을 만들어주세요"라는 요청에 대한 반응이 달라졌다.
입사 초: "BL이 뭔데요?" 3개월 후: "BL 발행 프로세스 중 어느 단계를 자동화할까요? SI 전송부터? 아니면 Draft BL 검증부터?"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 기반 접근
K사에서 배운 데이터 분석이 S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화물 추적 기능을 기획할 때 화주들이 가장 자주 확인하는 시점이 언제인지, 어떤 정보를 가장 궁금해하는지, 알림은 언제 보내야 하는지를 데이터로 찾아냈다. 데이터로 답을 찾는 습관이 물류에서도 통했다.
B2B 고객 이해
뷰티샵 사장님들과 화주(수출입 업체)는 본질적으로 비슷했다. 둘 다 사장님이고, 둘 다 실시간 정보가 필요하며, 둘 다 신뢰성을 중시하고, 둘 다 복잡한 건 싫어한다. K사에서 배운 B2B 고객 이해가 그대로 적용됐다.
자동화 설계 경험
K사에서 영업 현황 지표 자동화, 이탈 알림 자동화, 광고 플랫폼 자동화를 경험했다면, S사에서는 BL 자동 발행, 적하목록 신고 자동화, 화물 추적 자동 업데이트를 다뤘다. 본질은 같다. 반복 작업을 자동화해서 사람은 더 가치있는 일에 집중하게 하는 것.
입사 1개월차, 드디어 첫 프로젝트를 맡았다.
프로젝트 목표는 수출 BL 발행을 자동화해서 운영자 생산성을 150% 향상시키고, 오류율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기획 과정
K사에서 배운 PM 스킬인 사용자 인터뷰, 프로세스 플로우 설계, API 연동 기획, 백오피스 설계가 모두 그대로 적용됐다.
도메인 지식은 완전히 달랐다.K사에서는 뷰티, 예약, CRM을 다뤘다면, S사에서는 물류, 수출입, 포워딩을 다룬다. 사용자도 달랐다. K사는 뷰티샵 사장님, S사는 수출입 업체 대표. 기술 스택도 달랐다. K사는 웹과 앱 중심이었다면, S사는 API 연동과 AI 파싱 중심이다.
하지만 PM의 본질적 역할은 같았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설계하며, 이해관계자를 조율하고, 데이터 기반으로 의사결정하는 것.
사용자 중심 사고도 같았다. 뷰티샵 사장님이든 화주든, 사람들이 원하는 건 같다. 쉽고,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
자동화의 가치도 같았다. 반복 작업을 줄이고, 사람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게 디지털 전환의 핵심이다.
다음 편 예고 : 다음 편 "BL 자동 발행의 모든 것: 외부 API 연동의 지옥"에서는 첫 프로젝트였던 BL 자동 발행 기능을 기획하고 구현하면서 겪었던 기술적 챌린지와 해결 과정을 상세히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