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진격의 거인>
인류는 왜 끝없이 분열하고 싸우고 선동하며, 결국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가. 그 증오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사랑이라고, 작가는 연재기간 13년에 걸쳐 말한다. 만화란 외피에 가려 저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깊이는 웬만한 철학서보다도 묵직하고 진실했다.
거인과 인간의 싸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저 그런 소년만화가 아니다. 우리 안의 괴물은 누구인가, 자유는 누구의 몫인가, 역사란 무엇이고 증오는 어떻게 대물림되는가. 그리고 그 모든 파괴를 끊는 건 결국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세상의 가장 순한 문장을 알려주는 작품.
명장면을 꼽기 어렵다. 94개의 화를 관통하는 모든 대사가 명문이자 떡밥이다. 최애 캐릭터도 못 고르겠다. 작가는 찰나 지나가는 조연에게도 큰 서사와 숨을 불어넣는다. 다시 말해 '그냥 좋은 장면 몇 개 있는 애니'가 아니라, 거대한 운명 속에 놓인 '인간' 자체를 관통하는 서사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인물 버릴 수가 없다.
진격거는 우리가 무지와 공포, 선동으로 얼마나 쉽게 '타자'를 만들고, 그 타자화가 어떻게 또 다른 학살을 낳는지를 알려준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는 허상이었다. 또 이런 분열과 파멸은 인간의 본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학습된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 뒤에도 역사는 반복된다. 멈추지 않으면 누군가는 또 괴물이 된다.
전쟁도 이념도 국가도 무너졌지만 끝에 남은 건 사람 간의 신뢰, 연대, 사랑이었다. 결국 모든 건 '사랑하는 누군가' 때문이었고, 그 사랑이 모든 고통의 의미를 바꾸는 힘이 됐다. 경계선을 걷어낸 건 이해와 공감, 그리고 용기였으며, 그것은 희생을 동반했다. 그리고 그 희생을 존중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해답을 미래세대에 전할 수 있다. 나는 과연 그만한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여러 고민을 하게 한다.
현실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건 너무나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구호다. 다만 진격거는 사랑이란 '선택하고 책임지는 태도'라고 말한다. 때때로 사랑은 잔인한 선택을 요구하지만 그 선택이 진짜 종결이자 새 출발이 된다.
자유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나는 자주 자유롭고 싶고, 무언가로부터 속박됐다는 생각이 들면 벗어나려 무진 애를 쓴다. 갑자기 아프리카로 봉사를 떠나고 싶었던 것 한국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살기 싫다는 반발심과 자아실현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한 번뿐인 삶, 내 뜻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과연 그 선택의 무게와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자유는 필연적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고통일 수 있다는 게 작가의 전언이다. 실제 에렌은 텅 비고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세계를 꿈꿨지만, 그렇지 않은 사실에 큰 낙담을 하지 않았던가.
진격거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주제는 바로 <자유의지 vs 결정론적 운명>의 구도다. 에렌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있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기억은 과거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설정은 선형적인 시간을 붕괴시킨다. 특히 거인 중 '진격의 거인'의 능력은 미래를 보는 힘이 과거의 소유자에게 전달된다. 이건 원인과 결과가 바뀐 세계, 미래가 과거를 만들어낸다는 결정론적 구조다.
그래서 결국 에렌은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가장 순수한 욕망은 그저 벽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해방. 다만 미래를 본 에렌은 그 선택들이 진짜 본인의 선택이 아닌, 운명이었다는 사고에 잠식된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 길을 자발적으로 갔는가? 에렌은 두 가지를 동시에 믿었다. 1) 모든 건 예정된 것이었다 2)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 길을 걸었다. 에렌은 미래를 보고 그 길의 끝에 자신의 파멸이 있단 것도 알았지만 그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사실 에렌의 진짜 마음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것. 그들이 자신의 사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비는 마음이었다는 것은 그 모든 선택들이 고도의 계획이 아닌 감정의 필연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에렌은 자유로운 인간이길 원했지만, 그 마음조차 기억과 감정에 결정된 운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에렌은 진정 자유로웠는가?>는 질문엔 Yes!란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외려 No에 가깝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유일하게 흐름을 끊어낸 인물이 바로 미카사다. 에렌은 계속해서 '너는 날 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 명제를 깨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선택을 한다. 이건 자유의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시에 운명을 사랑하되,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간의 능동성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에게, 운명처럼 보이는 현실도 누군가의 선택들이 쌓여 만든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사회의 양극화, 세계의 전쟁, 구조적 폭력들 모두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침묵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굳어진 '결정된 미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결정된 서사 속에서 용기있는 선택을 던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미카사가 했던 일이고, 진격거가 말한 진짜 '사랑'이며 '자유'다.
"전쟁이 끝나고 모두 행복해졌다는 해피엔딩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건 분명 가능했습니다. 다만 동시에 전쟁이나 다툼이 사라지는 것도 뭔가 좀 거짓말 같습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최소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래서 유감이지만 그런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마 하지메, <뉴욕 타임즈> 인터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