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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Jun 20. 2020

19년 만에 받은 '남사친'의 e-mail  답신

'우연'에 '우연'이 겹쳐 '기적 같은 선물'을 받다!

베트남 생활을 정리하느라 바쁜 요즘, 베트남에 와서 집 문제로 줄곧 거래해왔던 부동산에 서류 하나를 Daum 메일(Hanmail)로 보내달라고 부탁해놓고는 깜박해버렸다. 요즘은 아이 학교로부터의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Gmail만 가끔 확인할 뿐, 특별히 찾을 메일이 없는 한 Daum 메일에 접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SNS에 밀려 사용을 잘하지 않게 된 이메일


부동산에 부탁하고 여러 날이 지나 Daum메일함을 열어봤더니 온통 광고메일들이다. 아무리 수신차단을 해도 광고메일은 차고 넘친다. 언제 도착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메일을 광고메일의 홍수 속에서 눈으로 구별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소 부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찾기 검색을 시도했다.

 '미소'라는 글자를 입력하는 순간, 내가 찾고자 했던 부동산으로부터의 메일이 아닌 생소하고 엉뚱한 메일 한 통이 검색되었다.

내 메일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 메일들과 메일 찾기에서 발견한 의문의 메일 한 통


2020년 3월 11일에 도착했는데 메일 확인을 하지 않아 석 달이 지나도록 모른 채 광고메일들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아침미소'라는 필명은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라 무시하고 덮으려다가 다시 보니 내가 보낸 메일의 답신이었다. 'RE'가 없었더라면 '너무 오래간만이다, 그치?'라는 유치한 제목의 메일이 차마 내가 보낸 메일일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건 뭐지??' 하는 마음으로 클릭을 했다. 클릭을 해서 메일 전체를 확인하고는 더 놀라 내 눈을 믿지 못해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보았다. 내가 편지를 보낸 날짜가 2001년 6월 12일이었다. 답신을 한 날짜는 2020년 3월 11일이니 무려 19년 만에 받은 답신인 셈이다. 메일의 내용을 보니 내가 2000년도 담임했던 학급의 일 년 생활을 담아 만든 디지털 앨범을 공유하고자 보낸 메일이었다. 내가 보낸 메일에 19년이 지나 답신을 보내온 친구는 자신의 메일에서 예전 자료를 찾다가 내 이름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미소 부동산'을 검색하려다 '아침미소'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처럼, 이 편지를 보내온 친구도 의도치 않은 '우연'으로 20여 년 동안 묻혀있던 내 이름을 꺼내보게 되었으리라...

친구가 보내온 메일(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 가림)

그러나 정말 난감했던 것은 보내온 친구의 메일 내용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보아도 '아침미소'가 누구인지 도대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겐 아주 특이한 재주가 하나 있는데, 10년 20년도 더 지나 까마득하게 잊고 살던 오랜 친구나 옛날 제자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이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한 남학생을 보는 순간, 초등학교 2학년 9반 같은 반 아이였으며, 분단장을 했다는 사실까지 순간적으로 기억해냈다(초등생 때 그 아이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물론 그 남학생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큰아이 초등학교 운동회에 갔다가 스쳐 지나가는 아줌마를 보고 중1 때 짝지였음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둘째를 데리고 동네의 이비인후과에 갔을 때 접수받던 간호사가 20년 전 중학교에 발령받아 첫 담임했던 제자임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불렀더랬다. 그러나 그 신통한 재주도 얼굴 인식, 시각적 기능이 동반될 때만 생겨나는 모양이다. 상대방과 내가 쓴 이메일 내용만 보아서는 나의 기억 레이더망에 걸리는 사람이 도무지 없었으니 말이다. 


친구로 추정(?)되는 '아침미소'씨는 다행히 메일에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놓았고, 나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메일 확인도 하지 않은 채였으니 '아침미소'씨도 혹시... 하는 마음이었다가 역시... 하며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되었을 터였다. 

나는 '기억해내기'를 포기하고, 카카오톡에 들어가 '아침미소'씨가 남겨놓은 전화번호를 입력하여 '연락처로 친구 찾기'를 시도했다. 참으로 똑똑한 스마트폰의 카톡은 다행히 한 사람을 찾아주었다. 그 사람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서야

'아~~~~!!!!!!!!!'

마치 강하게 내리치는 쇠망치에 기억의 잠금장치가 와장창 부서져 나가는 듯, 혼자 소리를 내지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의 말로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 듯하다.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했던 나는 1학년 때부터 물리과, 생물과, 지구과학과 학생들과 같이 듣는 수업이 많았다(각 과의 한 학년이 15명으로 4개 과가 다 모여도 60명이어서, 서로 이름을 알고 친하게 지냈다). 2학년 때는 화학교육과와 물리교육과가 과학실험 수업을 같이 수강했는데, 2명이 한 조가 되어 진행하는 수업에서 나는 화학교육과의 출석번호 15번, 그는 물리교육과의 1번으로 한 학기 동안 실험 파트너가 되었다.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시위에도 적극 참여하던 나와 달리,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다. 사범대학 졸업 이후에도 신학을 더 공부하여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는 조용하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사범대학에 들어왔는데 졸업 후 교사가 아닌,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겠다는 그 친구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나는 89년 전교조 가입 선생님들의 무더기 해직사태를 바라보며 예비교사로서 무척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그 일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도 그만두고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는데, 목회자가 되겠다는 그 친구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가까워진 것 같다.


수업을 전후로 얘기를 나누었을 뿐 따로 만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신 기억도 별로 없지만, 서로의 고민을 터놓은 사이라 그 이후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친구로 느꼈다. 활동 영역이 달라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절대적 신뢰'가 형성된 사람이라고 할까? 졸업 이후에 얼굴은 보지 못하고, 여러 해만에 어떻게 이메일로 연락이 닿아, 반가운 마음으로 보낸 편지가 바로 2001년 이메일이었던 것이다. 그 메일에서 나는 학급 아이들과 만든 디지털 앨범으로 상을 받았다고, 교사로서 잘 해내고 있다며 그 친구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 친구가 기뻐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메일을 보내고 친구로부터 답장이 없다고 섭섭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잘 지낸다는 나의 안부를 전하고 싶었고, 그 친구는 내 소식에 아주 기뻐했을 것이며 그 또한 자신의 길을 묵묵히 최선을 다해 걸어가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30대와 40대를 거치며 녹록지 않은 자신의 삶을 살아나와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직장일, 가사, 육아 등으로 친한 친구조차 만날 시간도 없이 그 세월을 바쁘게 지냈고 어느새 그 친구의 존재는 내 기억의 저편, 장기 보관 장소로 자리를 옮겨 저장되었나보다. 그리하여 그 기억을 현재로 다시 소환해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친구의 메일 답신을 19년 만에 받게 되다니. 그것도 메일함 속에 묻혀 죽어가다가 미소 부동산이란 이름 검색으로 3개월 만에 부활하게 된 이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앙을 접은 나로서는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인연'이라고밖에 말 못 하겠지만, 그 친구는 아마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연이든 하나님의 뜻이든,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카톡을 했다. 30년 전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아~~, 나 순영이야!" 

친구는 그가 뜻했던 바대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한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있으려니 했는데 의외로 그는 기독교 대안학교에 몸담고 있었다. 물리 선생님이 아닌 교목(校牧, 학교에서 예배와 종교 교육을 맡아보는 목사)으로서, 학생들에게 종교수업뿐 아니라 창조와 과학, 칼빈주의 수업도 한다고 했다. 그의 전공을 살린 절묘한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0여 년이란 시간은 카톡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메우기엔 너무 큰 시간적 공백이었다. 


나는 브런치에 쓴 나의 글을 친구에게 공유하였고, 친구도 이스라엘 순례 여행, 대안학교 학생들과 함께 떠난 국내외 탐방 선교 체험기 등 그동안 써온 많은 글들을 보내주었다. 서로의 글을 읽으며 지난 20여 년을 각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문장의 글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대학시절 서로 마음이 통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정서적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친구의 글을 읽어보니 알 것 같았다. 과학을 전공하면서도 인문학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공통점까지... 

친구는 시도 즐겨 쓰고 있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서 학생들과 윤동주 시를 공부하고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는가 하면 '별 헤는 밤'이란 이름으로 학생들과 별 보러 다니기까지 한다니... 이런 멋진 교목(校牧) 선생님이 또 있을까?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목회자로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교사로서 항상 자신을 비우고자 애쓰고, 올곧게 살아가는 길을 고민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을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삼스럽게 시, 공간적 이동과 무관한 이메일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을 넘고, 한국을 떠나 베트남에 와 있는 나에게까지 이렇듯 옛벗의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다니. 

더욱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다시 나를 찾아준 고마운 친구,  

19년 만에 받은 '남사친'의 이메일 답신! 

2020년이 내게 준 기적 같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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