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아빠의 퇴근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히 약주라도 드시고 오는 날은 6살 남 짓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최고로 행복한 날이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빈 손으로 오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소한 기름내음 풍기면 군데군데 얼룩지고 살짝 식어버려도 맛났던 전기구이 통닭부터, 추운 겨울 동치미의 단짝 친구인 군고구마, 안주가 남아서 갖고 오셨다던 오징어, 쥐포구이, 이름 모를 마른 안주들 그리고 전날 부부싸움이 있었는지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센베이 과자 등 밥 이외는 주전부리를 자주 할 수 없었던 때라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든 봉다리를 더 기다렸던 거 같다.
9시 뉴스를 시작한다는 앵커의 멘트가 자장가였던 나에게, 아빠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건 너무 큰 고문이었다. 그냥 자라고 아빠 오면 깨워주겠다던 오빠의 말만 믿고 잤던 나는, 다음날 뼈다귀만 남아버린 통닭의 사체(?)를 본 순간,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무리 잠이 와도 끝끝내 아빠를 기다렸다.
그러나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매번 잠이 들었고, 밤 잠이 없던 오빠는 혼자 인생 최고의 날을 누렸다. 다음날 대성통곡하는 딸내미가 가여워 오빠 몰래 따로 챙겨주시긴 했지만, 어느새 그것까지 오빠의 차지가 되어 버린 적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의 퇴근은 크리스마스 전날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항상 설레고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인생 최고의 날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외삼촌이 그 주인공으로, 어린 조카들을 위해 무지, 대땅, 하늘만큼 땅만큼 컸던 무언가를 선물로 들고 오셨던 것이다. 엄청난 크기의 종합 선물세트는 반짝반짝 빛나는 포장지로 쌓여 있었고,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풀면, 헨델과 그레텔이 전혀 부럽지 않을 과자 나라가 펼쳐졌다.
엄마 심부름으로 집 앞 가게에 갈 때마다, 몰래 훔치고 싶을 만큼 간절했던 아이들이 한 가득 나를 보면 방긋 웃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과자와 사탕, 초콜릿, 껌 등등 빈틈없이 꽉 차 있었고, 보는 것만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거 같았다. '뭐부터 먹을까? 이건 그동안 먹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 못 먹었는데 있네. 이런 과자도 있었구나'하면서 방 바닥에 나만의 백화점을 차려놓고 코와 입에서 액체가 나와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그저 좋아만 했었다.
"얘는 이런 거 엄마가 사주는데, 왜 이래?"하면서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솔직히 안 사주셨잖아요. 아니 못 사게 하셨잖아요'라고 되받아 치고 싶었지만, 굳이 추가로 매를 벌 필요가 없기에 참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잠시 미쳤던 내가 이성을 찾아야 했다.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생각보다 일찍 집에 온, 내 인생 최고의 날을 순간 인생 최악의 날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청룡 어린이 야구단 소속으로 순발력과 민첩성이 뛰어난 그 인물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완벽한 스킬과 명석한 두뇌로 가장 비싸고, 맛나고, 좋은 것들만 쏙쏙 뺏어가기 시작했다. 진짜 찰나의 순간이다. 어느새 내 백화점은 늘 먹던 아이와 가장 맛없는 양갱이만 덜렁 남아 있었다.
이 순간 빼앗긴 아이들을 다시 찾는 방법은 하나, 대성통곡이다. 방 바닥에 대자로 누워 두 팔과 두 다리를 허공에 흔들면서 오열을 시작한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도 않고, 말조차 나오지 않지만, 꼭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빠가" 엉엉~~ "과자를" 엉엉엉~~ 하면서, 여배우급 눈물 연기를 펼친다.
"그만 울어, 삼촌이 또 사줄게"
"아니, 너는 동생 꺼 다 가져가면 어떡해?, 너는 삼촌이 글러브 사줬잖니"
엄마와 삼촌이 날 달래는 듯 그 인물에게 뭐라고 하지만, 진실은 '그러게 오빠 오기 전에 빨리 숨기지. 그렇게 전시를 하고 있었으니, 당해도 싸'였다.
그 인물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아니면 엄마, 삼촌의 진심을 알았는지 동생 챙기는 멋진 오빠를 보여주지만 결국 또 맛 없는 아이만 준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혹시나 싶어 그 인물의 보물창고를 뒤지지만, 나보다 한 수 위다. 두고 나가면 내가 뒤진다는 걸 알고 다 들고 나가 버렸다.
이젠 남은 건, 눈물 젖은 양갱이를 먹는 일이다. 양갱이는 왜 이리 맛이 없던지, 그리고 왜 이리도 짠 맛만 나던지. 지금까지 양갱이를 잘 먹지 않은 이유가 아마도 이때 먹은 눈물의 양갱이 때문인 거 같다.
오열, 대성통곡 시도는 들인 공력에 비해 성과가 너무 비약했다. 그럼 2차 대전을 준비해야 한다. 아빠의 퇴근에 맞혀, 몰래 집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동네 어귀에서 아빠만 오기만을 기다린다. 저 멀리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 다시 눈물의 여왕으로 변신하자. 이번에 울면서 잘 뛰어 가야 해, 더불어 목 놓아 슬피 아빠를 불러야 하고, 그럼 레디 액션.
이때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면 안 된다. "아빠" 엉엉~~ "오빠가" 엉엉~~ "내 과자를" 엉엉엉~~ 이겼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저 계속 눈물만 흐르면 된다.
"왜? 오빠가 또 괴롭혔어? 아빠가 혼내 줘야겠네. 그만 울어 아빠가 업어줄까?"
싫다는 제스처로 고개만 살짝 흔들어 준다. 그리고 아빠의 손을 잡는다.
"그래 빨리 가자. 아빠가 오빠한테 맴매해줄 테니"
아니 안다. 아빠도 오빠를 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집에 가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집에 가는 길이 아니, 가게로 향하는 길로 시선을 돌리면서 아빠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아빠도 아셨는지, 못 이기는 척 내가 향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엄마랑 오빠한테 말하지 마"라고 윙크를 보내준다. 그럼 나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아빠 내가 무지 사랑하는 걸 알지'라는 표정으로 화한 웃음을 보여주면 완벽한 승리는 아니더라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이뤄낼 수 있다.
삼촌이 사 온 것보다는 한 단계 작은 종합 선물세트이지만, 어차피 나만 먹으면 되고, 효심 지극한 딸내미이기에 너무 큰 부담을 드리면 안 된다.
개선장군 행차 시간이다. 오른손은 아빠의 손을, 왼손은 검은 봉다리를 들고 들어간다. 엄마는 벌써 다 아셨는지, 살짝 겁을 주지만 때리지는 않는다. 왜냐면 아빠 뒤로 숨어 버리면 되니깐. 그 대신 그 인물이 눈치 채기 전에 나만의 보물창고에 숨겨둬야 한다.
울고 불고 너무 연기에 몰입을 했는지, 저녁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잠이 몰려 온다. 9시 뉴스 앵커 아저씨를 보고 자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 그리고 선물세트 속 아이들도 확인해야 하는데, 무리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 그 인물보다 일찍 일어나 나만의 백화점을 다시 오픈하기로 하고 잠이 든다.
꿈속에서 못된 마녀가 없는 과자 궁전의 공주가 되어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은 맛난 아이들과 엄청 재미 난 놀이를 해줬다. 그런데 저 먼 곳에서 먹구름이 오더니, 과자궁전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안 돼 안 돼 안 돼." 번쩍 눈이 떠졌다. 그리고 몰래 나만의 보물창고를 살펴본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하더니, 이 아이들은 잘 있구나. 포장지도 그대로 인걸 보니 말이다.
좋은 걸 아껴 먹어야 한다. 먼저 삼촌이 준 선물세트에서 몇 개 건지지 못한 아이부터 하루 이틀 충치를 키워가면 달콤한 간식타임을 갖는다. 보물창고 속 아이는 여전히 처음 그 모습처럼 그대로 있다. 이번에는 나의 완벽한 승리구나. 그 인물이 모르는걸 보니깐 말이다.
종합 선물세트를 두고 벌인 6년을 산 나와, 9년은 산 오빠와의 대전이다. 지금이야 과자, 초콜릿, 사탕이 흔하고 흔해졌지만, 어린 시절 집에 놀러 온 친척이 주는 종합 선물세트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멋진 종합 선물세트가 사라졌다. 너무 흔해져서 굳이 세트로 만들 필요가 없어서 그런가? 없기에, 가지지 못했기에, 작은 거 하나에도 큰 행복을 느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ps... 중간중간 조미료를 조금 넣었습니다. 6살 기억이 그리 선명하지 않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