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오후부터 내일까지의 9일은 나만의 가을방학이었다. 연휴 뒤로 남은 이틀에 연차를 썼기 때문이다. 작년 호주여행 이후로 길게 쉬어보는 시간이다.
나는 이 방학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기대는, 이번 방학동안 아무 계획을 짜지않고 오롯이 집에만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꼭 퇴사한 기분을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마침 입사한지 3년째 되는 날부터 방학이 시작되기도 했다. 3년 근속 선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가진 기대는, 어떤 글을 보고서였다. 창작자에게는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그 분은 브랜드를 운영하시는 분이었는데 1년에 한달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한다고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놔버리는 시간을 가지면 새로운게 나온다는 거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가수도 밴드를 그만두고 3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왔었다. 한 달이나 3년에 비하면 너무 짧은 9일이긴 하나, 그래도 뭔가 전보다는 뇌가 새로운 세팅을 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였다.
3년동안 계속 반복되던 디자인 업무와 내 집에서의 생활의 흐름이 끊겼다. 또 추석이 있어서 며칠간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밖에 나갔다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정말 요즘이 잊혀지고, 예전이 마치 비누방울처럼 피어오를 때면 마치 그때의 내가 된 듯 했다. 예전이 떠오르게 만드는 사건들이 생긴 탓도 있다. 이를테면 집에서 또 발견해버린 친구의 대학시절 편지라던가,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사람의 업로드, 오랜만에 정리하다가 나오는 옛날 물건들 같은거다.
자꾸 그때의 내가 된다. 그때의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컸다. 이 길을 가도 될까,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크던 시간, 불안한 마음에 이것 저것 시도하고 정보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3년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단 걸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내일만을 꿈꾸며 산 것 같다란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생때 목사님이 꿈이 있다면 지금 그 꿈을 이룬 것처럼 살라고 했다. 사진작가가 꿈이라면 지금 사진작가인 것 처럼 사진을 찍고, 작가가 꿈이라면 지금 작가인 것 처럼 글을 쓰고... 너무 막연하게 미래로 미루지 말라는 거였다. 그 말이 떠오르는 지금이었다. 디자인, 조금 더 넓게는 예술을 하고 싶었던 나는, 뭔가 직업을 가지고 환경이 세팅이 되어야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이미 재능과 열정이 있을때라는 것일텐데, 그냥 조금 부족해도 그때 많은 작업을 했다면 좀 더 그 과정이 행복하고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의미를 찾고 반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번 가을방학 동안은 그런 기회가 와도 굳이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더 이상 과거에 미련이 없어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쉬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뇌에 너무 힘주면서 살아왔다. 혹시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선택 뿐만 아니라 감정에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처음 며칠간 그랬다. 그러다 이번에는 푹 쉬는 시간임을 인지했을때 감정도 흐르도록 내버려뒀다. 슬프면 슬픈대로, 의미부여도 안하고 좋은쪽으로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다. 매일 노를 저으며 내가 정한 항로를 따라 움직이던 나는 이제 침대 위에 누워 흐르는대로 내 몸을 놔둔다.
흘러가다보니 어느덧 일상이라는 육지에 다다랐구나. 뭍에 올라가면 조금 더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야겠다. 그리고 물에서의 감각을 기억해야겠다. 그래서 꿈이 생겼다면 지금 그렇게 살아보고, 힘든 고민이나 감정은 너무 힘줘서 바꾸려 하지말고 흘러가는대로 두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다음 방학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