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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Mar 04. 2020

봉사활동에 따르는 개인적인 생각

환희, 절망, 체념, 위선

케냐의 슬럼가, 키베라에서 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은 보통 이곳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 2시까지 머무른다고 했다. 점심으로는 일반적으로 케냐 사람들이 먹는 *우갈리, 수쿠마 위키와 콩이 나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있는 동안 다른 가족들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해방되어 경제적인 일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갈리는 옥수수가루를 쪄낸 떡 같은 음식, 수쿠마 위키는 케일을 나물같이 무쳐서 먹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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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휠체어에 앉아 말도 못하고 침만 흘리는 데이빗에게 동화책을 보여주다가 갑작스레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키베라를 관통하는 기차의 궤도가 하필 학교 바로 옆이라 소리가 꽤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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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 소리에 데이빗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발작을 일으킨다. 손을 부르르 떨고 굳은 입 사이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이들은 기함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는가 하면 몇몇은 귀를 손으로 막고 머리를 처박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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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모두가 그 혼란에 맞춰 발광을 하지는 않았다. 선생님, 수잔 선생님만은 그 혼란에서 자유로웠다. 아이들이 기함을 치는 와중에 홀로 너무나도 평온하게 존재했다. 마치 슬로우 모션이 덧입혀져 아직 주변의 혼란이 전해지지 않은 것처럼... 이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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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물론 반복된 소리에 그녀의 고막이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주변 모든 상황을 인정하는 듯했다. 체념이 서려있는 무덤덤한 표정, 나는 그녀가 지나온 매일을 상상하며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봉사활동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된 사유의 흐름이 나타난다. 그 흐름은 크게 두 가지 줄기, 환희 혹은 좌절으로 시작된다. 앞뒤 순서가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후자의 양식으로 진행되기에 순서는 그리 중요치 않다.

*봉사를 철저히 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이 분류에서 예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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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는 봉사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감정이다. 마치 ‘초심자의 행운’처럼. 자신의 존재가 쓸모가 있으며 주체적으로 세상에 선한 플러스(+)를 보태는 기분.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기분은 봉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은 느꼈을 환희이자 희열이다. 그렇기에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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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 이 같은 환희가 지속가능하려면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 있다. 그것은 활자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지만 이곳에 몇 가지 대표 조건만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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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에 상당량의 대기업 지분을 보유하거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지대추구 성격의 재산이 필요하다. 허나 그러한 부를 티를 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교육배경을 가진 부모님이 있어야하며 이러한 기반과 본인의 운이 뒷받침되어 대단한 성공을 하는 일은 있어도 대단한 실패를 해서는 안된다. 너무 넓은 시야와 지식을 확보해서도 안된다. 자신이 봉사하는 것 이외에 베트남에서 네이팜탄으로 수천 명이 죽은 것을 몰라야하고 시리아 난민 문제도, 환경문제도 몰라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거나 만약 있다면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미쳐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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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딱하거나 툴툴대는 친구도 없어야 한다. 특히 철학과 출신이나 작가, 영화감독 따위를 꿈꾸는 친구는 반드시 없어야한다. 딱 자기만큼의 재력과 교육환경을 가진 친구들이 좋다. 힙합과 헤비메탈을 즐겨 듣지 않아야 하지만 얼터너티브 록까지는 용인되며 비틀즈를 좋아해야 한다. 천성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말을 생물학적으로 만 20살이 될 때까지 2000번은 들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높은 교육정도에 상관없이 적당히 멍청하고 순진해야 한다. 뾰족한 이유도 없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모호한 관성과 봉사를 하는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보다 고결하며 가치있는 삶이라는, ‘선한 사람이 가진 특유의 무지’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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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환희를 지속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약에 중독되었든가 아예 미친 사람일 것이다.




  환의의 조건 대부분이 자기노력으로 행할 수도, 의도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환의의 지속시간은 사람마다 다를지언정 높은 확률로 후자의 양식으로 진행된다. 바로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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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절 단계는 아무리 헌신적인 봉사를 해도 현실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맞닥뜨림으로 시작된다. 이는 종종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귀결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차원의 좌절은 빈번하게 개인의 영역으로 수렴되는 경향성을 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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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수렴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을 가한다. 가령 나는 왜 전쟁터가 아니라 평화로운 국가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는가, 나는 왜 천애고아가 아니라 멀쩡한 부모님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왜 삼시세끼 밥을 먹고 있는가, 왜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데 나는 왜 멀쩡히 살아있을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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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공한다. 현실에 대해 분노를 하거나 인정을 하거나. 분노를 선택하면 절망하게 되고, 인정을 선택하면 체념하게 된다. 

  절망의 경우 작게는 자기 존재에 대한 염증, 크게는 인간 전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 정신분열증에 걸리거나 덜 극단적인 경우 추체험을 꿈꾸며 이라크나 요르단 난민촌, 혹은 서아프리카 등의 현지로 가서 그들과 동화된다(주로 종교인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인다). 그보다 덜 극단적인 경우에는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단체를 떠난다. 그들은 분노를 택했기에 여집합을 대상으로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배타적 성향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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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해보지 않은 자의 눈에는 이 셋 모두 극단적으로 보인다. 또한 절망은 ‘사회적’으로도 그리 건강해보이지도 않는다. 허나 이러한 절망은 역설적으로 개인이 주체화되어 행동하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 방식이다. 





  앞서 살핀 나머지 한 가지 선택지, 냉정한 현실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체념하게 된다. 체념 상태는 위의 절망 상태에서 모든 분노를 토해내어 감정적으로 빈 상태가 된 후에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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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념 역시 좌절과 같은 맥락으로 넓게는 사회적으로, 좁게는 개인에 대한 자각으로 이뤄진다. 사회적인 체념은 수정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용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쉬이 이해가 가능하다. 개인적인 자각의 경우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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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자각의 이해를 위해서 환경운동가를 떠올려보자. 아무리 급진적이며 의지가 강한 환경운동가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본인의 사소한 일상에서 스스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령 자신이 지어진 건물에서 살고 있는 것, 차를 타고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도로로 주행하는 것, 플라스틱으로 된 안경을 사용하는 것 같이 사소한 것들. 따지고 보면 커피를 마시는 것도 환경파괴이다.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열매를 따먹으며 살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파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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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고결한 환경운동가더라도 완전무결하게 친환경적으로 살 수 없듯 개인에 대한 자각이란 인간이 본인의 행동을 완전히 파악,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낱 인간임을 깨닫는 것에서 오는 체념,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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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자각은 교육 수준이나 열정과는 상관이 없다. 보편적이며 광범위하다. 이러한 체념으로 봉사를 그만두는 사람도 보았다. 허나 체념의 특성상 포기와 달관의 성향이 짙기에 절망으로 단체를 떠난 사람보다 덜 감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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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념은 봉사하며 느끼는 감정 중 가장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체념이 가진 보편성, 현실성은 종종 다른 사람과의 공감을 가능케하여 연대와 공통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흔하지는 않지만 개개인의 의지가 합쳐져 생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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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조직을 만들거나 들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을 하며 봉사를 이어간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체념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이어가는 이들, 그리고 아마 수잔 선생님도 이 분류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수천 번 말한다. ‘원래 세상이 이런 거야’, ‘그래도 내가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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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그들을 보며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싸늘한 견해를 품는다.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존경이 담긴 인식을 품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체념함에도 봉사라는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이유는 ‘본인의 의지’ 이외에 어떠한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나큰 자기모순을 감내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남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타협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 분류인 위선의 경우 이 중에서 가장 유행인 방식인 것 같다. SNS와 같이 자아를 흩뿌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며 늘어난 점도 있지만 위선의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의 도식에서 일정 자유롭기에 많은 이가 택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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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히 본인의 명예나 바이럴, 이미지 등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봉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질이 좋지 않다. 그들은 사진이나 영상, 유명한 봉사 단체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봉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역시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 성립한다. 물론 정반대의 적용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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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 위선적인 사람을 무조건 싸잡아 경멸하는 것은 좋지 않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살면서 어느 정도의 위선에 일상을 지탱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위선과 거짓이 없는 세계관은 해리포터의 세계관보다 더욱 판타지이다. 우리는 위선으로 일어난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적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애써 곤란할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도 없다. 오늘 하루 자신의 일상을 되뇌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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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념과 위선 역시 구분하기 어렵다. 위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맥락에서 이해되는 특성을 가졌기에 넓은 측면에서 보면 체념한 사람의 봉사 역시 위선의 범위 안에 놓을 수 있다. 실제로 체념적 봉사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일정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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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동기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그 층위에는 평소 전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치가 혼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층위 중 가장 그럴싸한 것을 대외적 동기로 삼는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기가 단일하거나 100% 순수하기는 어렵다. 순수는 종교적 영역이거나 소설, 초월의 영역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가능할 리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층위를 인정하고 개개인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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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논점으로, 그렇다면 반대로 위선적인 봉사를 행하는 이들이 봉사의 가치를 100%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은 나름의 목적이 있겠지만 그들이 봉사를 하며 속으로 ‘나는 철저히 목적을 가지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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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선이란 단어의 뜻이 선을 가장해서 악을 저지른다는 의미인데 위선으로 하는 봉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설사 봉사를 가식으로 할지언정 선한 영향력을 행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동기가 어떨지언정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봉사를 하는 사람이 절망과 체념으로 단체를 떠난 사람보다, 아예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봉사의 핵심에 더 다가간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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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또 다른 분화가 가능함을 깨달을 수 있다.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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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절망에 빠져 현지에 가서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 비록 체념했으나 본인의 의지로 봉사를 이어가는 사람들, 보이기 위한 봉사라도 하는 사람들, 이들은 마음가짐이나 의도가 어떠하든, 봉사를 하지 않는 이보다는 많은 공적을 사회에 베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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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와 결과가 같은 선상에 놓이는 것이 모범적이겠지만 봉사의 영역에서 동기가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물론 개인의 동기가 민주사회에서 용인되는 범위 안에 있긴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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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러한 도식이나 본인, 타인에 대한 검열에 잠식되지 말고 봉사라는 행위를 실제로 행하고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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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관성으로 하는 봉사든, 위선으로 하는 봉사든, 진심으로 하는 봉사든. 어떻게든 남을 도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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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하지 않고 말만 하는 자들의 비판을 애써 무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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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라는 행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꼭 전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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