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가 주최한 생일 시사회에 다녀와서.
2014년 4월 23은 아들이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다. 열흘 전 주말, 아들과 나는 수학여행 때 입고 갈 옷을 샀다. 옷걸이에 옷을 걸어두고 그 날이 오길 기다렸다. 며칠 후, 인문학 수강 도중 무음으로 된 휴대폰에 불이 번쩍거렸다. 전화를 받지 않자 여기저기서 문자가 쏟아졌다. ‘아들 수학여행 갔어?’ 그날 이후, 단원고 근처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의 수학여행은 취소되었다. 일주일 후에 벌어졌다면 내 아이 일이, 아니 내 일이 됐을 그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묶였다.
안산 고대 병원에 임시분향소가 생겼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으며, 도대체 왜 아이들을 한 명도 살리지 않았을까. 의문과 분노가 가득한 가슴을 들고나가 울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25시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고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분향소가 화랑유원지로 옮겨졌다. 여전히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낮과 밤 기온 차 때문에 밤에는 제법 서늘한 밤이었다. 25시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한쪽에 앉아있는데 아들과 아들친구가 다가왔다. 아들 친구는 잠바 주머니에서 뜨거운 캔 커피를 두 개 꺼내서 내 주머니에 넣어 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어른들이 미안해야 할 일인데 외려 아이는 이 자리에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둘러보니 초에 불을 붙이고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이 즐비했다. 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본 아들은 내 등을 연신 문질렀다. 캔 커피도, 아들의 손도 따뜻했다.
사건은 남겨둔 채 시간만 흘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통해 유가족들을 만나고, 진실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게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우리들의 제한된 몸부림이었다. 그들의 가설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김 총수와 미친 김 감독(김지영 감독)의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진실을 향한 추적’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잊히지 않게 계속 이슈를 만들어 줬으니까.
세월호가 인양되고 아들과 목포에 갔었다. 세로로 누워있는 세월호는 끔찍하기보다 초라했다. 팽목항은 아무도 오지 않아 주변은 스산했고 노란 리본들은 빛이 바랬다. 아들과 나는 분향소에서 향을 피우고 깨끗한 노란 리본을 줄에 매달았다. 우리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 엄마들로 구성된 극단 ‘노란 리본’에서 만든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나는 유가족 엄마들이 이 순간만큼이라도 조금 덜 외로웠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크게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내가 열렬히 보내는 응원의 눈빛이 내 눈물에 가려질까 봐 연신 눈을 깜빡였다.
문제인 정부가 들어서고 작년, 처음 정부가 주관한 4.16 추모제가 안산에서 열렸다. 이낙연 총리가 와서 사과했다. 국민이 300명이 넘게 죽었는데 사과 한마디가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이제 진실이 밝혀지겠구나.’ 싶으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세월호 영화가 나왔다. ‘당연히 봐야지’하는 의무감과 ‘어떻게 보지?’하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때마침 오마이뉴스에서 연락이 왔다. 감사하게도 이곳에서 주최한 단체관람에 초대해 주었고, 이 자리에는 영화를 만든 이종언 감독과의 대화도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물론 시민기자 자격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휴지 한 다발을 오른손에 쥐었다.
생일은 세월호로 아들을 잃은 가족의 그날 이후 이야기다. 순남(전도연 분)은 몇 년 동안 연락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 남편 정일(설경구 분)이 원망스럽다. 정일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지만 혼자 그 일을 감당해야 했던 순남에게 이유가 되지 못한다. 순남은 어린 딸을 키우며 꾸역꾸역 생을 살아내느라 매 순간이 위태롭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마침내 깜깜한 터널을 지나 치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순남은 아들 수호의 새 옷을 사서 아들 방 옷걸이에 걸어둔다. 아직 치우지 못한 수호 방에는 교복이 걸려있고, 책상 위에는 풀다만 모의고사가 놓여있다. 수호가 사무치게 그리운 밤, 수호의 방에 들어가 수호에게 말을 걸다가, 수호 이름을 부르다가, 울음은 비명이 되어 온 아파트에 울려 퍼진다. 그 피를 토하는 절규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나는 차라리 내 귀를 막고 싶었다. 아무리 막아도 그 통곡은 내 심장을 찢어 놓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지 덩어리는 짜면 물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나도 두려웠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아들 수호의 생일날.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가족, 친구, 다른 유가족들, 수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호를 추억하며 울고 웃는다. 다큐멘터리처럼 자연스러운 이 장면의 씬 스틸러는 순남 뒤에 앉아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인상 좋은 아주머니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의 선한 얼굴을 한 그의 눈물에는 진심만 가득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슬픔이 다가 아닌 영화다. 카타르시스를 통해 위로를 건네는 영화.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질문을 하는 사람도 목이 메어 잠시 숨을 고르고 답을 하는 감독도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공백에 다들 가슴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봤다. 얼굴이 엉망진창이다. 같이 간 친구는 나에게 쌍꺼풀 수술하고 나온 사람 같다고 했다.
안산에 살고 있는 1997년생 아이를 둔 부모라면 모두 세월호에 얽힌 사연 한 자락은 가지고 있다. 작은 도시라 한 다리만 건너면 다들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이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의 사연과 하나씩 오버랩되면서 얽힌 감정들이 풀어지고, 사나웠던 감정들이 순화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애도하고 마음 아파해 주는 걸 보니 오래된 상처들이 밖으로 나와 볕을 쐬고 따뜻한 바람에 말라 새 살이 돋으려 간질간질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jtb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이 화제가 되었다. 노회찬에게 비로소 작별을 고한다는 손석희는 마지막 문장에서 한 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그의 여백은 그 어떤 말보다 강했다. 그의 브리핑을 보며 뜨거워진 목구멍을 식히느라 얼마나 큰 숨을 반복해서 몰아쉬었는지 모른다. 이제 나도 그처럼 경건하게 호흡을 잠시 멈추고, 나의 여백 또한 어디쯤 가닿길 바라며, 자판을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적어본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아들의 친구들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