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염이 아름다웠던 남자들 -
한국사 전공자로 다른 3명의 연구자와 함께 장희빈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한 일이 있습니다. 풀풀 책 먼지만 맡고 살던 만년서생인 제가 으리으리한 회의실에서 주연 배우의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도 나눠 봤습니다. 그 당시 KBS 2 TV로 방영 중이던 7대 장희빈은 김혜수 씨, 숙종은 전광열 씨였습니다.
TV드라마로 장희빈은 1대 김지미 씨에서 9대 김태희 씨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여배우가 열연했습니다. 숙종도 1대 김진규 씨에 이어 신성일, 박근형 씨 등 탑 배우들이 연기했습니다.
연구 수행을 위해 1961년에 제작된 작품부터 당시 7대에 이르는 작품까지를 검토했습니다. 1960년대 작품은 사실 고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라, 진지한 장면인데 실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아, 내가 미챠~’
그 뒤 학문적 관점으로 역사창작물을 분석한 일은 없었습니다. 가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얼핏 봤던 한 두 장면을 재미 삼아 이야기해 준 일은 있습니다. 자리 잡고 볼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요즘 역사물은 참 잘 만들었다 싶습니다. 최근 제작 출시된 역사물에 대해 미디어에 올라온 많은 리뷰나 소감이 그를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예전 사극에서도, 요즘 사극에서도 가끔 눈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남성배우의 말끔히 면도한 수염하나 없는 턱입니다. 물론 연출 의도는 압니다. 문외한이지만 분장의 어려움도 있겠다 싶습니다.
남성 턱수염은 모양은 천차만별이어도, 대개 10대 시절부터 납니다. 서양만이 아니라 조선의 남성들도 그 수염 관리에 제법 신경 썼습니다. 인물을 소개하거나 평할 때에 수염은 용모를 평하는 기본 조건의 하나였습니다.
- 그대의 부친은 큰 키에 용모가 수려하고 수염이 보기 좋게 아름다우며, 코가 오뚝하고 얼굴이 맑고 윤기가 있어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그 아름다운 자태가 선명히 돋보였다.
- 내가 어렸을 적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을 뵈었다. 그는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훌륭하였다.
- 공은 얼굴에 위엄이 있고 이마가 넓으며 수염이 아름다우며 키가 11척 2촌이나 되었다. 몸의 태도가 천만 명의 위에 뛰어나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하여 큰 산악과 같았다.
‘그는 수염이 멋있었다.’고 고백한 조선시대의 어떤 처자도 있습니다. 글공부하는 선비를 몰래 훔쳐봤는데, 멋진 수염에 반했다고 합니다. 당대 사람이 남긴 인물평을 접하며 상상된 남성의 이미지와 역사물에 등장한 남성 연기자의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이 제 머릿속에서 종종 어수선합니다. 전공 때문에 극으로 몰입해 감상하지 못하는 제 탓입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이라는 『효경』 첫 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문화를 정면에서 부정한 단발령이 강행되었고, 상투 자르는 관리가 민가까지 들어가 강제로 상투를 잘랐습니다. 피하지 못해 관리에게 잘린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양식 면도도 남성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20세기 이후에도 내내 학교, 군대, 그리고 사회에서 강제적 두발 단속 참 많았습니다. 그 험악한 기억을 흩어 버리며 남배우가 열연하는 화면 가득 잡힌 옛사람의 멋진 수염을 감상합니다. 참 멋있습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역사물 제작 방영은 늘 반가운 소식입니다. 연기도 어쩜 그리 잘하시는지요! 치밀한 고증에 놀라기도 합니다. 보시는 분들에게도 마음으로 넙죽 감사인사 올립니다. 역사 속 인물로 살아 움직이는 이들을 더 가까이 보게 되리라는 기대와 더불어 모두 모두를 응원합니다.
※ 2019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으로 조선의 갓이 K-문화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때 슥슥 그린 조선시대의 여러 쓰개입니다. by Jae hong Kim (아들..)
※ 인용원문출처 : 한국고전종합DB. 하륜(1347-1416), 신종호(1456-1497), 이영(李穎: ?~1278) 등에 대한 인물평. ‘수염이 아름답다’는 ‘아름다울 미’를 사용해 대개 ‘其美鬚髥’라고 기록. 서술의 편의상 간략히 의역.
※ 김혜수, 전광열 주연의 KBS 2 드라마 <장희빈>은 2002년 11월 6일 ~ 2003년 10월 23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