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엄마 장롱 서랍에는 보라색 주머니가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그 주머니를 호기심에 열어본 일이 있었다.
주소가 영어로 써진 국제우편 봉투들이 차곡히 누워 있었다. 겉봉만 보았을 뿐, 펼쳐보지도 않었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나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아버지’라는 아주 낯선 단어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편지는 엄마 서랍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몇 년 전, 엄마는 삶의 자리를 정리하고,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셨다. 너무 연로하셔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 엄마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물건을 내에 맡기셨다. 집 등기, 은행 통장 등, 그리고 그 보라색 주머니도.
나는 그제야 보라색 주머니의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묵은 종이 냄새 속에서 시간이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편지를 받은 순서대로 편지 겉봉에 일련의 번호를 적어 놓았다.
우체국 소인이 1955년이니, 70년을 견딘 편지였다.
아버지와 엄마가 사귀던 시절, 아버지가 미국에 1년 가게 되었고, 그때 보낸 국제우편이다. 그 안에는 원고지에 미국에서의 경험을 에세이처럼 쓴 글도 한 뭉치 들어 있었다.
나는 <No. 1>이라고 써진 봉투를 집어, 조심스레 펼쳤다.
바스러질 것 같은 편지지 위, 세로로 흐르는 아버지의 필체, 첫 문장부터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운 그대에게, 나의 별, 星 ☆★★
얼마나 星을 그리워하는지 모르오. ”
엄마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성’(星)이다. 아버지는 내내 엄마를 ‘나의 별’이라고 불렀다. 나는 편지를 다시 접었다. 이유도 모른 채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려,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조금 뒤, 다시 펼친 편지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북두칠성이 반짝이고 있소.
하늘에 수없는 별이 뿌려진 아름다운 밤이요.
아... 그 별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별인 성(星)을 그리워하고 있소.”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세상에 없던 분. 하지만 편지 속 아버지는 웃고, 사랑하고, 연인과의 미래를 꿈꾸고, 엄마와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나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사랑은 너무나 짧았다. 엄마와 결혼해 겨우 다섯 해를 살고, 어느 날 밤 아버지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상주가 된 4살 아들 손을 잡고 남편을 묻고 돌아온 방에는 7개월 내가 엄마를 기다리며 외할머니 손에서 버둥이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 그날, 26세이던 내 엄마는 지금 구순 노인이 되셨다. 나와 오빠에게 눈물 한번 보이지 않고, 한숨 한번 새지 않고, 내 어머니는 그 긴 세월을 도대체 어떻게 견뎌온 것일까...
그 답은 어쩌면, 장롱 속 보라색 주머니에서 오랜 시간 조용히 별처럼 빛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