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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07. 2020

중국 대련 여행_바다낚시를 하다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3박 4일의 대련 여행이 끝난 지 벌써 삼일 째. 여행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려고 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본다. 여행 기간 내내 들이마셨던 신선하고도 진득한 바다 내음과 귀를 바짝 긴장시켰던 중국어도 어느새 희미해져 있다. 아무래도 여행을 하며 그때의 느낌을 바로 적어 내려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현장의 느낌만으론 여행기가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여행기란 어느 정도는 크고 작은 굴곡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현장의 생생한 느낌만을 바란다면 티브이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시청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행이 끝나고 아이가 집에 와서 그린 그림들이다. 식탁에 통째로 올라왔던 검고 울퉁불퉁한 해삼은 알록달록 예쁜 모습으로, 굵고 단단한 가시가 온몸에 박힌 멍게는 가볍고 빠르게 달려가는 귀여운 모습으로, 거무튀튀했던 우럭도 예쁜 눈동자를 하고 마치 열대어와 같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원래라면 까만 점으로 그렸을 눈인데 제대로 물고기 눈이다. 퀭하지 않을 뿐.  현장에서 직접 보고 관찰하며 그렸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그림들. 바다생물들을 직접 보고 느꼈던 그 생생함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즐거웠던 감정이 물고기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배어 나온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그림의 주인공들은 엄연한 해삼, 멍게, 우럭이었으며 예쁘게 탈바꿈한 그들의 모습엔 아이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글로 쓰는 여행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당시의 느낌과 감정에 따라 상상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장소는 같아도 경험은 독보적이다. 한 사람의 독보적인 여행기는 독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한 번 더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가보지 않은 곳일수록, 생소한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처럼 여행지는 같은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걸 보는 우리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기록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그 기록을 읽는 이에 따라서 또 한 번 달라지기도 한다.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몇 번이고 곱씹어진 그런 다름의 시각과 경험들을 삼키는 것. 그리고 달고 쓰기도 한 그 경험들을 통해 내면이 성장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아무리 짧은 여행이라도 모든 여행은 대체로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여행자를 성장시키고 글로 읽는 여행을 하는 우리들 또한 성장시킨다.



우리 가족은 남편회사의 중국 직원들에게 초대를 받아 그들만의 리그에 함께했다. 원래는 대련 도시의 영업 직원들 단합대회였는데 어쩌다 우리 가족도 함께하자는 얘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스무 명 내외의 모임 중 한국인은 우리들 뿐. 남편이나 아이들이나 중국어로 소통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기에 남편이 같이 가겠냐 물어봤을 때 흔쾌히 그래 좋아 라고 대답했다. 회화는 좀 딸려도 어느 정도 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됐지 싶었다. 그런데 웬 걸, 이박 삼일을 꽉 채워 아침부터 밤까지 주야장천 들려오는 중국어, 처음 보는 중국 직원들과 단 며칠의 생활이라도 함께 공유하며 지낸다는 것은 낯선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꽤나 낯선 경험이었다. 해외여행 좀 하며 낯선 사람들 틈에 한 사람의 관광객일 뿐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낯선 것을 좋아한다고 그동안 쉽게 단정 지었던 모양이다.


출발한 날은 정식 휴일이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 남편은 대련에 도착한 후 호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직원들과 회의가 있어 먼저 나갔고 중국 직원 한 명이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호텔 근처에 있는 바다에 갈 예정이었는데, 내심 나와 아이들만 가도 괜찮았지만, 그게 편했지만, 중국 직원들 측에서 적극적으로 배려해 준 터라 감사해서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아이들도 중국 삼촌과 놀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나와 아이 둘, 남자 중국 직원 한 명과 시작된 그야말로 오묘한 조합의 1일 투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아빠, 엄마, 아이 둘의 평범한 그림이었으나, 조금만 더 쳐다보고 있으면 금방 알아챌 어색함이 흐르고 있는 그런 그림. 다행히도 그런 어색함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는 웃는 얼굴의 달변가였고 10살 된 아들도 있는 아빠였다. 내가 중국말을 알아듣고 어느 정도 소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엔 엄청난 속도의 중국어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내가 아는 아주 간단한 중국어로 맞장구만 쳐줄 뿐이었는데도 그는 아주 즐거워했다. 잠깐 골치 아픈 회사 일에서 벗어나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닌 애 엄마와 아이들과 바다에서 휘적휘적 보내는 공식적인 업무시간에 무척 만족한 듯 보였다.


그렇게 시원한 듯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했고 나와 그는 언어의 장벽이 있는 것 치고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취사 가능한 레지던스형 호텔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일정은 호텔에서 보내고 밥도 해 먹겠다고 하니 그는 손사래를 치며 여행 와서 무슨 밥을 하냐면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라고 했고 메뉴는 ‘아무거나’라고 하니 또 한 번 손사래를 치며 가능한 식단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렇게 출발한 차 안에서 둘째는 잠이 들었고 나는 아이가 잠들었으니 호텔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또 한 번 말을 건넸지만 호텔과 식당 위치가 바로 붙어있으니 도착해서 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조금씩 말할 수 없는 피곤이 몰려왔고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중국말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나와 아이들은 차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떠보니 꽉 막혀있는 도로. 시간은 한 시간도 더 지난 뒤였으며 그건 퇴근시간은 물론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난 시간임을 의미했다. 아차, 그냥 우리끼리 호텔에 들어가기 민망한 상황인 데다 마침 둘째도 잠에서 깼기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일정을 끝내기로 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며 뭔가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중국어를 머릿속에서 찾아 헤매던 차에 들리는 한 마디, “레이슬러~.” (피곤해 죽겠네). 잠이 퍼뜩 깬 그 순간, 눈 앞에서 슬로모션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담배 한 개비. 그는 익숙한 손길로 재빨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하얀 연기는 뒤에 있는 나와 아이들에게 스멀스멀 날아왔다. 헉하며 거리를 두려던 차에 그는 잊었다는 듯 아차 하며 돌아와 첫째 아이의 손을 잡으며 길 건널 때는 삼촌 손 잡고 가자고 한다.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뒤로 쌩쌩 달리는 차들을 뚫고 지나가며,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담배연기와 나란히 손 잡고 큰길을 건넜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 무지한 중국인들. 뭐든 섣불리 정의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그렇게 싸잡아 대 전제로 정의 내리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아이 손을 붙잡고 채왔을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끄응.  


중국 생활 7년째, 아주 가끔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낯섦이 나를 지배할 때가 있다. 아니,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 같은 때가 있다.


다음 날. 그렇다. 본래 우리의 목표는 바다낚시였다. 아이들과 실제 배 위에서 물고기를 낚아보는 경험을 기대하고 온 것이다.


그 날의 바다는 실로 평화로웠다.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정말이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변에는 항상 철썩거리는 파도가 있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파도가 아예 없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주 잔잔한 물결만이 있을 뿐이다. 파도 위에 흔들리는 배 때문에 아이들이 뱃멀미를 하면 어쩌지 했던 걱정이 무색하도록 배는 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고요하게 떠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해변에서 바라본 시선으로만 바다를 판단하고 있었구나. 바다 한가운데는 한 번도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난 사실 이런 배낚시가 처음이었다. 신혼여행에서 호핑투어라는 이름 하에 배 끄트머리에서 낚싯대를 몇 번 드리워보는 것. 실제로 물고기를 낚았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 그것 말고는 태어나 처음 해보는 낚시였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왔더라도 첫 낚시의 설렘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나서 특히 좋은 점 한 가지는 이렇게 세상을 처음 보는 눈을 아이를 통해 공유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생선이 아닌, 방금 전까지도 바닷속을 마음껏 헤엄치던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그 신선함,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모를 뻔했다.


대자연의 힘은 놀랍다. 대자연이라고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랜드 캐년, 록키산맥, 백두산 같은 것들이지만 사실 우리 집 뒷산도 대자연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자연 앞엔 항상 ‘대’ 자가 붙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 자연 앞에서 사람은 항상 ‘작은’ 인간이 되니까.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있는 작은 고깃배 안에서의 우리들은 아주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다. 태어나 생전 처음 낚시해보는 6살, 4살 아들들이나, 나이 마흔 이상씩 먹은 어른들이나,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물고기를 잡았을 때의 표정은 매한가지다. 세계 어느 곳이든 대륙의 끝에는 바다가 항상 존재하며 어느 정도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배를 타고 나와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배 위에서 신라면 스프를 넣은 매운탕을 함께 끓여먹고, 가져온 간식거리를 서로 나눠먹으며, 가끔 서로 알아듣지 못할 때는 그냥 웃는다. 정서는 달라도 감정은 통한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의 첫 바다낚시라는 첫 경험을 통해 내 안의 뭔가는 리셋되었고 낯섦은 점차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변해갔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섬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큰 배를 타며 3층에 올라가면 갑판이 있고 거긴 좀 추우니까 이번엔 그냥 자리에서 쉬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또 밖에 나가 보고 싶다고 졸라 남편이랑 아이들만 구경하러 올라갔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보며 좋아할 아이들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돌아오는 이 배 안에서는 가만히 앉아서도 어딘 어떨지 알고 있다. 왔을 때 한 번 타봤다고 익숙해진 것이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낯섦과 익숙함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익숙함을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지만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는 때론 느슨해지고 정체된다. 아이들은 이미 본 것 또 봐도 재밌다고 하는데 난 한 번의 경험으로 조금 익숙해졌다고, 이젠 다 알고 있다고 앉아서 쉬려고 한다. 처음이라면 무조건 나가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을 텐데. 혹시 또 아는가, 이미 봤던 것을 또 봤을 때 무언가 색다르게 보일는지. 익숙한 것에서도 낯섦을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까. 낯선 것들은 감각을 깨우기 마련이므로.


함께했던 중국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첫날 동행했던 담배 연기에게는 그 날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따로 건넨 후, 우리 가족은 새로운 도시 잉커우로 가서 하루를 더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낯설었던 것 투성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익숙해진 건 돌아올 때 탔던 왕복 여객선 한 척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 낯섦보다는 익숙함이 더 많아질 것이란 사실이고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도 낯섦은 여전히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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