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희생>으로 보는 렘브란트의 창의력
렘브란트의 아버지인 하르멘 헤리르스존 반 레인은 네덜란드 남쪽 레이덴(Leiden)이라는 도시에서 풍차 방앗간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제분사(Miller)로 개신교 신자였고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빌렘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부르크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제과업을 하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딸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빵집을 경영하는 건물주의 아들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렘브란트는 그를 화가로 만들기 원하는 열성 넘치는 부모에 의해 14살의 어린 나이에 레이든 대학에서 들어가서 라틴어와 네덜란드어를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부모는 그를 경제적 문화적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으로 유학을 보내어 당시 그곳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인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에게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게 하였다.
피테르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온 잘 나가는 유학파 작가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당시 전 유럽에 르네상스 미술의 화려한 색채를 알렸던 베네치아 화파의 대부인 티치아노(Titian: 1488-1576)와 바로크 회화의 시대를 개척한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기술을 배웠다. 티치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로 정확한 선과 면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자연스럽고 풍성한 색채의 사용을 중요시했던 화가였다. 그는 생동감 있는 인물의 동작을 잘 표현했고 특히 그가 활동하였던 베네치아 화파의 가장 큰 특징인 투명한 공기로 보여지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색감과 금빛과 붉은빛 등 화려한 색채의 조합을 잘 사용하였다. 카라바조는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빛을 켜서 사람들을 비춘 것 같은 극적인 밝음과 어둠의 대조를 사용하는 기법과 과장한 제스처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은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을 통해 입체감 있고 생동감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면서 르네상스 미술을 바로크 미술의 시대를 바꾼 작가이다.
피카소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얘기했다.
피카소를 비롯해서 모든 화가들은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모방해서 그리면서 그림을 배운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 즉 본인을 비롯한 천재 예술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핵심을 자기것을 만들어서 가져간다는 뜻이다. 즉 같은 작품을 보고 모방하면서 그림을 배워도 천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작가라는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이삭의 희생”이란 작품을 다른 작가들의 같은 제목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그가 모방을 통해 어떻게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있다. “이삭의 희생”은 성경 창세기 22장에 쓰여진 내용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여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창세기 22장 2절-13절
먼저 티치아노가 그린 "이삭의 희생”을 보면 둘이 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는 슬픈 표정의 나귀와 대조적으로 아버지를 믿고 있는 순진한 어린아이로 그려진 이삭의 무표정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중앙에서 한 손에는 커다란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머리를 누른 채 고개를 돌리고 역동적으로 서 있는 아브라함이 전체 화면을 압도하고 회색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폭풍 전야를 방불케 하는 급박함과 불안함을 준다. 바람에 날리는 붉은색과 짙은 초록색의 옷을 입은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기 위해 근육질의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른손에 든 칼을 내리치려 하고 있다. 이삭이 있는 왼편 구름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무릎 꿇은 이삭의 몸과 그를 죽이려는 아버지의 오른손과 굳건히 땅을 버티고 서있는 다리 그리고 그들을 말리려는 천사의 손짓을 비추면서 어둠 속에 슬픈 표정의 나귀가 걱정하는 것과 다른 해피 엔딩이 되는 것을 알려준다.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서 주제와 인물의 표정을 강조하는 방식은 카라바조에 의해 더욱더 발전되었다. 카라바조는 이삭의 희생이라는 제목으로 2점의 유화를 남겼다. 1598년에 그려진 첫 번째 작품에서 카라바조는 배경을 전부 검은색으로 없애고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아브라함, 이삭, 제단, 천사, 양만 남겨 놓았다. 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한 하늘 나오는 천사와 구름 배경 그리고 모든 디테일을 과감하게 없앴다. 연극 무대에서 갑자기 배경의 불을 꺼지고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해서 주인공을 밝게 비추면서 극적인 대사가 시작되듯이 가장 밝은 빛이 천사의 인자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의 얼굴과 손으로 잡고 있는 양을 비추고 있다. 아브라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천사는 곧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는 극적인 대사를 시작할 것 같다. 그리고 손이 묶인 채 몸을 살짝 뒤틀고 자신 대신에 희생될 양을 쳐다보고 있는 이삭의 시선과 덤덤한 표정을 통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을 알 수 있다.
3년 뒤에 카라바조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은 추기경 주문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미래의 교황이 될 추기경을 위해서 가톨릭 교회당과 풍경을 그려 넣으면서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조는 다소 약해졌다. 이 작품은 다른 카라바조 작품들 중에 유일하게 풍경이 그려져 있다. 연극 무대 같은 인물의 표정과 빛을 부각시키기 위해 검은색 배경을 사용했던 카라바조였지만 미래의 교황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했다. 전작에서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천사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던 스포트라이트 빛은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 눌려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소리 지르는 이삭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천사는 한 손으로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단호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미리 준비된 숫양을 가리키며 아브라함에게 무언가 얘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덤덤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천사를 쳐다보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모르는 이삭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몸을 뒤틀며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 전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들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다. 두 인물의 감정보다 주변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바라조는 성스러운 상황보다 두 인물들의 내면의 감정이라는 주제를 빛의 강조를 통해 잘 표현했다. 교황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고 배경에 풍경을 그려 넣었지만 카라바조는 연극의 가장 큰 요소이자 자신이 잘 표현하는 인물의 내면의 감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스승이었던 피테르 라스트먼이 그린”이삭의 희생”을 보면 그가 티치아노와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산속의 제단과 하늘에서 두 손을 들고 나타난 천사의 모습 그리고 한 손으로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이삭의 머리를 누르며 뒤에 있는 천사를 쳐다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티치아노의 그림과 구조가 비슷하다.
하지만 배경에 천사가 나오는 하늘을 강조했던 티치아노와 다르게 피테르는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이삭을 강조하기 위해서 배경을 거의 검은색 산으로 채색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사용했던 연극조명 같은 밝은 빛을 이삭에게 비춰서 그의 두려움이라는 내면의 감정을 강조하였다.
렘브란트가 27살에 그린 "이삭의 희생"을 보면 그 역시 스승인 피테르를 통해 티치아노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왼쪽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는 구도는 분명 티치아노의 작품과 유사하다. 하지만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회색빛 하늘에 스티커처럼 둥 떠있던 천사를 렘브란트는 회색빛 구름 사이로 자연스럽게 하늘을 열고 나타난 천사로 그려졌다.
아름다운 깃털의 날개를 가진 천사는 금발의 빛나는 머리카락과 화려하게 수놓아진 옷을 바람에 날리면서 단호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는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천사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다정한 손짓은 분명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놀란 표정의 아브라함의 얼굴과 아브라함이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다리를 꼬면서 괴로워하는 이삭의 몸짓 신성보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했던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는 49세에 같은 주제로 에칭화를 남겼다. 화려한 색의 옷을 입지 않은 살아 있는 선으로 그려진 드로잉은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이다. 누가 나에게 어떤 작가의 "이삭의 희생"을 제일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이 작품을 꼽을 것이다. 금빛과 검은색 대비가 없어도 화려한 붉은색과 청색이 없어도 날카로운 선으로만 이렇게 빛과 어둠 그리고 순종의 믿음을 보이는 자를 따듯하게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이 나오는 작품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구름진 하늘의 어둠 속에서 제단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아브라함은 한쪽 무릎을 이삭 쪽으로 세우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믿고 있는 이삭의 눈을 가리면서 그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눈을 보면 차마 칼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삭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눈물을 참으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아들을 향하여 칼을 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 어둠을 뚫고 형용할 수 없는 밝고 따뜻한 빛이 아브라함을 감싸고 그의 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빛과 함께 같은 천사가 나타나서 뒤에서 그와 떨고 있는 이삭을 포근하게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면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라고 얘기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천사는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지만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두려움에 떨리던 몸이 멈추고 하나님의 다정한 음성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나도 따뜻하고 포근한 빛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위로받고 싶어 진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 따뜻하고 인자한 하나님께서 빛처럼 우리에게 찾아와서 위로해 주시고 도움을 주실 거라는 것이 믿어진다.
20대의 렘브란트의 “이삭의 희생”에서 보이는 믿음은 이쁘고 화려한 천사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행해야 믿어지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면 렘브란트의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으로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화려했던 명성과 돈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렘브란트는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순종하며 매일을 버티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하나님은 따뜻한 품에 꼭 안고 넘치는 창의력을 부어주시면서 영적인 눈을 열어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돈과 명성이 없어도 한 끼를 때울 빵이 없어도 노년의 렘브란트는 그림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